“정치권이 실제 내용보다 슬로건과 명칭에 목을 매는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공정거래법이 이 땅에서 시민권을 얻은 것은 1981년이다. 기묘하게도 박정희 정권은 공정거래법을 기피했는데 신군부정권은 입법에 적극적이었다.
개발연대의 공업화는 직접 연출을 맡은 정부가 대기업을 주연배우로, 해외의 자본과 시장을 관객으로 삼아 벌이는 연극무대와 다를 바 없었다. 주연배우를 싸고돌면서 흥행을 꾀했던 정부는 대기업들에 규제보다 지원을 앞세웠다.
일본통인 박정희는 일본의 공정거래법이 연합국군사령부(GHQ)에 의해 1947년 ‘재벌해체, 경제력집중 배제’를 목적으로 도입됐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공정거래법 도입이 그의 재임 중인 60∼70년대에 네 번이나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반면 신군부 정권은 정통성이 결여됐던 만큼 여당 이름을 민주‘정의’당으로 할 정도로 유난히 ‘정의’ ‘공정’ 등의 단어를 좋아했다. 집권 과정에서의 콤플렉스가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정거래법 역시 경제‘정의’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당시 권력층으로서는 솔깃한 법안이었을 터다.
당시 공정거래법 제정에 깊숙이 참여했던 인사들조차 신군부의 공정거래법 추진을 ‘역사적인 아이러니’라고 회고한다. 이는 정치권이 실제 내용보다 슬로건과 명칭에 목을 매는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대목이다.
문제는 공정거래법의 성과다. 10대 재벌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간 매출액 비중은 박 정권의 마지막 해인 1979년 25%에서 지난해 77%로 급등했다. 지난 30여년간 10대 재벌의 구성은 일부 달라졌으되 경제력집중 배제라는 공정거래법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지 못했던 것이다.
법안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 신군부가 ‘공정’이란 말에 혹해서 공정거래법을 도입했지만 당시 재벌들의 반발이 거셌던 탓에 제1조의 목적 조항에 ‘과도한 경제력의 집중을 방지하고’라는 말을 포함시켰을 뿐 구체적인 규제 조항을 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거론되는 지주회사 문제, 출자총액제한, 상호출자금지, 금융자회사에 대한 소유 지분 및 의결권 제한 등의 내용은 86년 제1차 공정거래법 개정 때 비로소 도입된다. 이어 87년 6월 항쟁으로 얻은 정치민주화를 계기로 재벌의 경제력 집중 문제는 경제민주화의 핵심 의제로 떠올랐다.
그럼에도 재벌 총수 1인의 독점적이고 특권적인 경영 지배, 기업 이익의 독점, 재벌에 봉사하는 금융산업 구조 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 등 공정거래법 자체가 일부 후퇴했고, 철저한 법 적용을 하지 않거나 시장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탓이 크다. 여기에 계열사 간 상호출자 금지에 대항해 순환출자 방식이라는 틈새를 개발할 만큼 치밀한 재벌들의 대응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9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10대 재벌의 계열사끼리 거래한 사업금액 152조7000억원 중 133조원(87.1%)이 계열사 간 수의계약이었다. 이는 계열사 간 내부자거래, 일감몰아주기 등의 폐해를 내포하는 것이다. 현행 공정거래법은 이런 문제들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여야 정치권은 연일 경제민주화를 외친다. 우선 민주통합당은 9일 ‘경제민주화 실현을 위한 9개 법률개정안’을 당론으로 발표했으나 경제민주화를 왜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새누리당 유력 대권 후보인 박근혜 의원도 10일 대권 도전을 공식 선언하면서 경제민주화를 3대 핵심 추진과제 중 첫째로 꼽았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분분하기만 하다.
경영의 민주화, 분배의 공정화, 금융의 민주화를 앞세워 한국자본주의의 틀 자체를 일신하겠다는 것이라면 당연히 환영이다. 그런데 지금 정치권의 경제민주화는 소리만 요란할 뿐 별 실체가 없다. 30여년 전 신군부가 ‘공정’이란 표현에 혹했던 것과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다.
기존의 법체계만으로도 충분히 보완 가능한 문제를 유권자들의 귓가를 자극하는 내용을 담아 과대포장해 이슈를 선점하겠다는 모습이 아닌가. 보기에 참 딱하다.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
[조용래 칼럼] 그들이 경제민주화를 외치는 까닭은
입력 2012-07-10 1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