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김동환] 상실의 시대

입력 2012-07-10 18:28


학자금 융자를 받아 대학을 다니던 시절. 우후죽순처럼 올라가던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며 집 없는 설움에 고개를 떨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강 건너 공장에선 매연과 폐수가 하염없이 흘러나오고, 황사와 흙먼지를 뒤집어쓴 잿빛 하늘은 저녁노을 속으로 또 그렇게 저물어갔다.

개발도상국 한국의 자화상이 그랬다. 그래도 그땐 희망이 있었다. 억압과 부조리로 점철된 앙시앵레짐(舊제도)을 떨쳐버리고 자유롭고 합리적인 시민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파토스(pathos·열정)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자릿수를 기록하던 경제성장률에 스스로 놀라며 언젠가는 선진국 반열에 오를 것이란 목표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지금은 어떠한가. 세계에서 7번째로 선진국을 상징하는 20-50(1인당 GDP 2만 달러, 인구 5000만명) 클럽에 가입했다는 기쁜 소식도 잠깐, 가계부채가 1000조원에 육박하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을 훌쩍 넘고, 간신히 3%대 경제성장률을 유지하는 저성장시대로 돌입한다는 암울한 전망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부동산 거품이 꺼져 집을 팔아도 빚을 못 갚는 경우에 대비하여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비장한 목소리도 간혹 들리지만 좀처럼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유권자의 표심만을 계산하는 정치가의 정치공학, 경제공학에는 차가운 로고스(logos·이성)만이 존재하기 때문일까? 선진국 국민으로 살아 본 기억은 별로 없는데 벌써 선진국병에 걸려 희망을 상실해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사실 세계에서 첫 번째로 20-50클럽에 가입한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 영국 독일 등 거의 모든 선진국도 가계부채 문제로 골치를 앓아왔다. 그런데 이들이 우리와 다른 점은 개인 빚뿐만 아니라 나라 빚이 무척 많다는 것이다. 예컨대 현재 GDP 대비 국가채무는 우리나라가 30%를 조금 넘는 수준인데 반해 일본과 미국은 각각 200%와 100%를 초과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 나라는 오랜 기간 저성장으로 세금을 낼 여력이 줄어든 까닭에 젊은 세대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세대들이 갚아나가야 할 빚인 장기국채를 대량 발행해 예산을 마련해 왔다. 그만큼 상실의 정도가 우리보다 훨씬 심하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세대를 주축으로 희망을 상실한 99%의 시민에 의해 점거된 최근의 월가는 선진국 특히 미국의 자화상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진실에 다가가자, 심각해지지는 말고…”(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문제는 빚의 내용과 질이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그래왔듯이 빚을 내 도로와 항만, 교육 시스템을 정비하는 등 사회간접자본을 형성하고 이를 현재 및 미래 세대가 공공재로 이용할 수 있다면 걱정할 것이 없다. 이 경우 빚은 모두를 위한 투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도한 위험 추구로 부실해진 특정의 금융기관이나 기업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는 나라 빚, 재테크 수단으로 과도하게 사용되는 개인 빚은 문제다. 이들이 빚을 지는 것에 대한 수치심, 그리고 에토스(ethos·윤리)를 상실하고 나면 그때는 표심을 계산하는 정치가의 로고스 위에 군림하여 선량한 다수의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미 선진국이 되어 목표를 상실했기 때문인지, 누군가에게 희망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인지 진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다가가야 한다. 목표를 상실한 사람은 울고 희망을 빼앗긴 사람은 화를 낼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파토스를 회복해야 한다. 하지만 심각한 방법으론 진실에 접근하기 어렵다. 그래서 로고스가 여전히 필요하다. 희망을 앗아갈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에토스가 필요하다. 계산적인 에토스가 아니라 공감과 배려에 입각한 에토스이면 더욱 좋다.

김동환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