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들 웃기고 울린 ‘恨의 몸짓’… ‘1인 창무극’ 대가 공옥진 여사의 삶과 예술 세계
입력 2012-07-09 19:30
걸쭉한 입담과 익살스런 표정으로 서민들을 웃기고 울린 ‘1인 창무극’의 대가 공옥진씨가 9일 오전 4시52분 전남 영광의 한 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9세. 고인은 199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투병 중이었다.
파란만장한 일생을 해학적인 춤과 한 맺힌 소리로 펼쳐낸 고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1933년(본인 기억은 1931년) 전남 영광에서 남도 인간문화재 1호인 공대일 명창의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판소리를 배웠다. 그의 조부는 한국 최초의 국립극장인 서울 정동 협률사 초기 멤버인 공창식 명창. 하지만 가난한 집안 때문에 일곱 살 때 1000원에 일본으로 팔려가 당대 제일의 무용가였던 최승희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면서 무용에 눈을 떴다.
5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960년대까지 임방울창극단, 김연수우리악극단, 박녹주국극협회 등 국악단체에서 활동했다. 이후 10여년간 농사를 지으며 살다 1978년 서울 ‘공간사랑’ 개관 기념공연에서 전통 무용에 해학적인 동물 춤을 접목한 ‘1인 창무극’을 선보이며 주목받았다.
동양인 최초로 미국 링컨센터에서 단독 공연을 올리고 일본 영국 등 해외 공연을 통해 가장 한국적인 예술로 극찬을 받았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1998년 무형문화재 지정을 신청했으나 고증자료 미비 등을 이유로 거부되고 제자들도 하나둘 떠났다.
2004년 공연을 마치고 나오다 다시 쓰러져 왼쪽 몸이 마비된 그는 2007년 국민기초생활수급자로 매달 43만원을 받으며 근근이 생활했다. 그의 비참한 생활이 2009년 한 방송을 통해 알려지면서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1998년 이후 칩거생활 11년 만에 국민일보와 생전 마지막 인터뷰(2009년 12월 2일자)를 한 고인은 “염병할 문화재, 더 이상 말하지 말어. 이미 내가 온 국민이 아는 문화재인데 누가 또 무슨 문화재를 준다는 거여”라며 10년 동안 반복된 문화재 자격 논란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자신의 춤을 ‘병신춤’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장애인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여”라고 했다. 그의 남동생은 벙어리였고 손수 키운 조카는 척추장애인이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진 후 2010년 ‘1인 창무극’ 중 심청가 부분이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그해 6월에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한국의 명인명무전’이 열린 서울 국립극장 무대에 올라 마지막 공연을 펼쳤다. “맺히고 맺힌 한을 풀었다. 이젠 죽어도 원이 없다”고 소감을 밝힌 그는 ‘옥진이, 동면에서 깨어나 학이 되어 날아가리라’는 당시 공연 제목처럼 모든 것을 훌훌 털고 한 마리 학이 돼 날아갔다.
영광 농협장례식장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에는 딸 김은희(64)씨와 손녀 김형진(41)씨가 조문객을 맞았다. 그룹 투애니원(2NE1)의 공민지는 고모할머니인 고인의 빈소를 부모와 함께 찾았다. 공민지는 평소 할머니의 영향으로 한국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다며 고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해 왔다.
지역 문화예술 인사들의 발길도 줄을 이었다. 임종을 지켜본 고인의 유일한 전수자 한현선(47)씨는 “함박꽃처럼 예쁘게 가셨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장례는 영광문화원 주관으로 문화인장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12일 오전 10시(061-353-0444).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