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손수호] 고래잡이, 고래구경

입력 2012-07-09 18:30

우리나라 포경(捕鯨)의 역사는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거는 돌고래 뼈가 무더기로 발견된 부산 동삼동 패총이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50여종의 고래가 그려져 있다. 5∼10명이 탄 포경선이 있고, 20명이 탄 초승달 모양의 배에서 작살로 고래를 명중시켜 운송하는 그림도 있다. 원시 포경의 역동적인 장면이다.

그러나 포경은 3D 업종이었다. 모든 어로가 그렇듯 위험성에 비해 수입이 일정하지 않아 농업과 목축업이 발달하면서 자연스레 쇠퇴해갔다. 어업이 성행한 조선시대에도 그랬다. 당시 문헌에 이런 대목이 있다. “고래가 표박(漂迫)하면 경유를 얻어 이익이 많으나, 관(官)이 독점하고 백성에게는 폐가 되므로 죽은 고래를 바다에 도로 밀어 넣었다.”

포경업은 해방 후에 비로소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일본 수산회사에 고용되어 포경기술을 배운 선원들이 울산 장생포를 거점으로 뭉쳤다. 비즈니스 고래잡이의 출발이었다. 1946년 4월 16일 첫 포획에 성공한 뒤 한 해 평균 500여 마리를 잡았다. 국제포경위원회(IWC)가 상업적 고래잡이를 전면 금지한 1986년 이후 포경선은 포구에 꽁꽁 묶였다.

최근 정부가 포경 재개 논의의 물꼬를 텄다. 과학 목적의 포경을 허용하자는 것이다. 새롭게 형성된 고래고기(鯨肉) 시장도 한몫 했다. 경육은 한국인의 대중음식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기호가 다양해지면서 바다에 사는 포유류 특유의 맛을 즐기는 사람이 늘었다. 동해안에 고래가 늘어나 어장 피해를 가져온다는 어민들의 호소도 작용했을 것이다.

반론도 거세다. 한국 바다에 노닐던 그 많던 수염고래류가 사라지고 작은 밍크고래만 명맥을 이을 뿐이다. 밍크고래는 임신기간이 10개월에 이르고 1년에 한 마리만 낳지만 그나마 새끼가 모두 성체로 자라지도 못한다. 세계가 한국처럼 너도나도 포경을 허용할 경우 금방 멸종된다는 것이다. 고래를 보고 즐기는 관경(觀鯨)이 훨씬 생태적인데다 수익도 더 올린다는 주장도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자료다. 동해바다에서 밍크고래가 늘어 어족 생태계가 파괴될 정도인지, 여전히 개체수가 감소하고 있어 위험한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더욱이 IWC 보고서는 지난해 포경과 관련한 규정위반 사건 23건 중 21건이 한국 해역에서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대책 없이 고래잡이에 나섰다간 실속 없이 국제사회로부터 욕만 바가지로 먹을 것 같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