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냄비 땜장이에서 영국 최고의 크리스천 작가가 된 존 버니언 (上)
입력 2012-07-09 18:20
아내가 기져온 책 두권으로 종교에 새롭게 눈떠
“이 세상의 황막한 곳을 헤매다가 나는 한 굴이 있는 어떤 장소에 우연히 이르렀다. 거기에 몸을 누이고,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더러운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자기의 집을 등지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남자는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등에 무거운 짐을 짊어졌다. 내가 보는 앞에서 그는 책을 펴 들고 그 내용을 읽었다.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몸을 덜덜 떨었다. 나중에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슬프게 통곡하면서 소리쳤다. ‘아,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존 버니언(John Bunyan, 1628∼1688)의 대표작 ‘천로역정’의 시작이다. 천로역정은 작가의 꿈이라는 형식을 빌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순례자가 ‘멸망의 도시’를 떠나 험난한 길을 걸어 마침내 ‘하늘나라’에 이르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천로역정은 존 밀턴의 ‘실낙원’과 더불어 영어권 기독교 고전의 쌍벽을 이룬다.
실낙원과 천로역정은 모두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작품들이다. 존 밀턴이 크롬웰의 비서관이었다면, 존 버니언은 크롬웰 군대의 소년병 출신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신의 존 밀턴에 비해 존 버니언은 시골의 그래머 스쿨에서 읽기와 쓰기를 겨우 배운 땜장이 출신으로 변변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존 밀턴의 실낙원에 버금가는 작품 천로역정을 썼다. 천로역정은 현재 100개 이상의 다른 나라 말로 번역되어 가장 많이 읽히는 크리스천 인문학의 고전이 되었다.
성서 다음으로 기독교인이 가장 많이 읽는다는 천로역정을 쓴 존 버니언은 뜻밖에도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결혼하기 전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짓을 하는 데 나를 당해낼 사람이 없었다.” 도대체 존 버니언은 어떤 방탕한 삶을 살았기에 마치 탕자처럼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고백한 걸까?
그가 죄로 고백한 방탕한 삶의 내용은 평소 그가 즐기던 춤이나 몰래 남의 집 종치기, 시골 들판에서 벌이는 운동 경기 등 오늘날로 보면 이런 것이 죄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은 오락들이다. 그런데 그는 왜 이런 것을 죄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 이유는 존 버니언이 소년병으로 입대한 크롬웰의 청교도 군대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존 버니언은 영국 베드포드 인근 엘스토에서 땜장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베드포드와 올리버 크롬웰이 농사를 짓고 살았던 헌팅던은 가까운 곳이었다. 크롬웰이 무장한 청교도들로 의회파 군대를 조직해 왕당파에 대항할 때 헌팅던은 청교도주의의 중심지가 되었다.
존 버니언은 16세의 나이로 소년병에 징집되었다. 입대 후 2년간 그는 고향 근처인 뉴포트 파넬에서 복무했다. 큰 규모의 전쟁에 참가한 적은 없고 근처에서 벌어진 왕당파군과의 소규모 전투에 따라 다녔을 가능성이 높다.
크롬웰의 부대는 강한 청교도 의식에 사로잡힌 정예 부대였다. 청교도들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타협을 하지 않으려 하는 까다롭고 고지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생활에서도 금욕과 세속적 쾌락을 죄악시했다. 존 버니언은 2년간 이런 크롬웰 부대에서 군대생활을 했다. 그러니 그가 그런 것을 죄악시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군대에 있을 때 그런 것을 죄라고 배웠지만, 그것을 포기하지는 못했다. 그는 자서전 ‘넘치는 은혜’에서 어린 시절 세상에 대한 부정과 반항 때문에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생활을 했다고 고백했다. 그때 그는 달콤한 죄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1648년에 결혼하면서부터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썼다.
첫 번째 아내는 고아였다. 가진 것이라고는 아버지가 죽을 때 유산으로 남겨 준 책 두 권이 전부였다. 그러나 가난한 땜장이 청년 존 버니언 역시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존 버니언 스스로 ‘접시나 숟가락 같은 가재도구도 없을 만큼 매우 가난한 상태에서 서로 만났다’고 언급할 정도로 가난했다. 고아였던 아내가 결혼지참금 대신 가져 온 책은 아더 덴트의 ‘평범한 사람이 하늘에 이르는 좁은 길’과 루이스 베일리의 ‘경건 훈련’이었다. 이 두 권의 신앙 소책자는 존 버니언으로 하여금 종교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했다.
역설적으로 새롭게 눈 뜬 신앙이 그를 오히려 낙담케 했고 절망케 했다. 그는 신앙을 위해 세속적 즐거움과 오락을 내려놓기로 결심했지만 세속적 즐거움과 오락은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죄를 극복하지 못하면, 성경 말씀대로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를 절망케 하고 말았다. 절망한 나머지 신앙마저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더 나아가 신을 모독하고 배반하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어느 날 아침에 그는 사탄의 음성에 굴복하고 그리스도를 배반해버렸다고 믿기까지 했다. 그때 버니언은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총에 맞아 나무에서 떨어진 새처럼 쓰러졌다.”
하지만 존 버니언은 성경을 다시 읽으면서 자기가 죄로 인해 죽어 마땅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성경에는 죄에 대한 경고뿐 아니라 죄에서 구원받는 말씀도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존 버니언이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존 기퍼드라는 목회자 덕분이었다.
존 기퍼드는 베드포드 독립파 교회 목회자로 이전에 왕당파 군대의 소령이었던 인물이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의회파 소년병 출신의 버니언은 왕당파 출신의 목회자를 통해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
존 기퍼드가 목회하던 세인트 존 교회는 침례교회였다. 침례교회는 영국 청교도의 여러 파 가운데 하나로 생겨났다. 침례교회는 성서의 원리를 강조하며 재세례파처럼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신앙을 고백한 자들에게만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재세례파와 달리 그리스도인의 참정권, 맹세와 전쟁 참여를 인정하였다.
세인트 존 교회는 침례에 의한 성인 세례를 실행했으나, 침례를 교인이 되는 자격으로 고집할 정도로 엄격하지 않았다. 침례교회를 더 확산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교인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존 버니언은 1655년경 침례를 받고 이 교회의 정식 교인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를 ‘죄인의 괴수’에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울로 여겼다.
그는 땜장이 교육밖에 받지 못했지만 곧 평신도 설교가로서 재능을 나타냈다. 그의 설교는 죄 때문에 영적인 고민을 심각하게 겪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특히 효과가 있었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쇠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위해 나 자신도 쇠사슬에 묶인 채 그들에게 갔고, 그들에게 주의하라고 설득하기 위해 내 양심에서 얼마 전에 타오르던 불을 담아 갔습니다.”
존 버니언은 사도 바울처럼 교인들을 방문하고 권고하는 활동을 활발히 했다. 그러나 1660년 찰스 2세의 왕정복고로 그동안 버니언과 같은 독립파 설교자들이 활동하기에 우호적이었던 분위기가 급변했다. 버니언은 1660년 11월 12일 사우스베드퍼드셔에 있는 로어 삼셀에서 밤 집회를 인도하다가 체포당했다. 영국 국교회와 일치하지 않는 예배를 집행한 혐의였다. 당국은 설교를 중지한다면 곧 풀어주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버니언은 그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당국은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