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잘 보여야”… 병원내 성희롱 ‘중증’
입력 2012-07-09 17:10
#“어이, 신입. 이리 와서 내 옆에 앉아봐. 요즘 애들은 키도 크고 늘씬해. 나이가 어떻게 된다고?” 간호대학을 갓 졸업하고 서울의 대형병원에서 일하게 된 A씨는 의사와 간호사가 모인 회식 자리에서 성희롱을 당했다. 한 의사가 대놓고 엉덩이와 허벅지, 가슴을 만졌지만 그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상황을 외면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의사는 병원 내에서 ‘신입 킬러’로 통했다.
#“김 간호사, 초음파 장비 새로 들어왔는데 테스트해야 하니까 검진센터로 와.” 센터로 간 간호사는 불이 꺼지고 커튼까지 친 초음파실에서 성폭행을 당했다. 소리를 질렀지만 들리지 않았고 성폭행으로 고소하자 의사는 명예훼손으로 맞고소 했다. 결국 병원을 나오게 된 쪽은 피해자인 간호사였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올해 3월 조사한 병원 내 폭언과 폭행, 성희롱 실태조사결과에 따르면 간호사의 31.9%가 의사로부터 폭언 및 성희롱을 당한 것으로 나타나 타 직종에 비해 높았다. 상급 관리자로부터 당한 피해 사례도 간호사가 20.6%에 달해 간호조무사나 의료기술직, 행정직 등보다 많았다.
대부분 병원에는 성희롱 관련 규정이 명확히 없고 의사 중심의 병원 특성상 성희롱을 문제 삼아 외부에 알리는 순간, 피해는 가해자가 아닌 사실을 밝힌 피해자에게 넘어온다. 노조에 알리고 문제를 공론화 하면 보복성 인사 혹은 해고를 당하는 경우도 많다. 병원이라는 공간의 특수성과 고용상 불평등 문제로 성희롱이 일어나도 이를 밝히기 어려운 것이다.
실제 성폭행으로 병원을 그만두게 된 간호사 B씨는 성폭행을 알리겠다고 하자 주변에서 만류했다. “문제 삼아봐야 너만 피해 본다, 나가게 되는 건 의사가 아니라 우리 같은 비정규직”이라며 조용히 덮을 것을 주문했다. 그는 “병원에 문제가 알려지자 의사가 부르더니 하는 말이 ‘나한테만 잘 보이면 되는데 간호사 하기 싫은가 보다, 나는 병원 그만둬도 갈 데 많지만 너는 있냐’였다. 치가 떨렸지만 모두들 ‘네가 참아라, 어렵게 간호사 되지 않았느냐’는 말만 했다”며 울음을 터트렸다.
또다른 병원의 수간호사는 “비정규직이나 파견직이 성희롱 대상이 되는데 문제가 되면 의사나 정규직은 남겨두고 비정규직을 해고하면 그만이라는 인식이 있다”며 “병원에서는 의사한테 잘 보이면 요직에 오를 수도 있기 때문에 일부는 자기 부서 직원을 이용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 병원에서는 최근 성희롱을 당한 여직원이 노조 측에 문제를 알렸지만 오히려 피해자가 평소 행실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한다. 가해자가 병원 보직자인 의사로부터 신임을 받던 행정관리직이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가해자가 전국의 병원에 소문을 내 피해자의 재취업 길도 막힌 상태다.
보건의료노조 관계자는 “성희롱은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것도 어렵지만 알리는 순간 보복성 인사 조치가 내려지는 경우가 많다”며 “이는 병원에 성희롱 예방이나 금지를 위한 제도가 없기 때문인데 성희롱이나 폭언은 환자나 보호자에게서도 당할 수 있다. 병원 내 성문제에 관한 기구를 설치하고 병원 자체적으로 가해자를 징계할 수 있는 방안이 제도적으로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지 쿠키건강 기자 ohappy@kuki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