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애란 (1) 사선 넘어 도착한 남한 땅엔 ‘IMF 삭풍’ 쌩쌩

입력 2012-07-09 21:10


내 나이 33세이던 1997년, 천신만고 끝에 북한을 탈출했다. 7개월간 정부부처에서 교육 및 조사를 받은 뒤 남한 땅에 처음으로 발을 내디뎠다. 감회도 새로웠지만 심정은 착잡하고 복잡했다. 나의 눈물겨운 탈북 과정은 앞으로 천천히 독자들에게 밝힐 것이다.

남한에서 당장 생활을 해야 하니 직장부터 찾아야 했다. 당시 서울은 IMF로 대량 실업상태였다. 어디 가든 감원 바람으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난 IMF가 어떤 것인지도 몰랐다.

중국에서 조선족들이 전하는 남조선 사정은 상당히 잘사는 나라였다. 조선족들이 남조선에 식모로 일하러 가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북한 우리 집에 자주 놀러오던 최씨 부부는 남조선에 대해 한바탕 자랑을 늘어놓았다.

“중국에서는야, 돈이 많으문 남조선으로 가지, 뭐 하러 (북)조선으로 가겠소? 남조선 가문 돈을 엄청 벌어온답데.”

“가서 뭘 하면 돈 벌어요?”

“가정집에 가서 식모살이두 하고, 식당에 가서 일하면 조선에 다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벌지비.”

“그래요?”

“그렇챙구, 우리 마을에 한 명이 남조선에 가서 1년 벌고 왔는데 집을 샀소.”

“조선에는 10번 가도 집은 고사하고 밑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비.”

우리는 중국에서 온 최씨와 다른 사람들을 통해 남조선 소식을 간간이 들었다. 간부들의 비공개 강연에 나온 자료들을 통해 남조선은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잘산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자본주의사회였기 때문에 그렇다고 여겼다. 북한에도 상류층은 엄청 잘살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초대 경비 소대장을 지내고 나중에는 북한의 경비국 국장을 지냈던 아버지와 김일성의 주치 의사를 했던 어머니를 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네 집에 초대 받아 갔다가 눈이 뒤집히는 줄 알았다.

방마다 놓여있는 천연색(컬러) TV와 전화기, 냉장고, 가스레인지,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욕조, 집안에서 풍기는 음식과 향수 냄새까지. 북한의 일반 사람들과는 도저히 비교도 되지 않는 풍족한 생활을 하는 그 친구를 보니 은근히 적개심까지 일었다.

“오, 북조선에도 이런 세상이 있다니….”

신세가 비참하게 느껴졌다. 당시 평양은 배급을 안 주고 수도도 잘 나오지 않았다. 물자가 부족해 평양 사람들도 고생하던 시기였다. 그야말로 그 친구네 집은 딴 나라, 딴 세상이었다. 이처럼 평양에도 엄청난 부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남조선도 잘산다고는 하지만 일부 부자들의 천국일 것이라고 난 생각했다.

따라서 내가 탈북을 했지만 남조선에 대한 동경심은 크게 없었다. 그래도 북한에서보다는 더 잘살 수 있고 당연히 더 잘살아야겠다는 기대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남한이 내 인생을 장밋빛으로 만들어 줄 것인가. 그러나 나는 IMF 위기를 맞은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청소부로 남한 생활을 시작했다.

△약력=1964년 평양 출생. 74년 9월 조부모가 6·25때 월남한 집안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양강도로 강제추방. 신의주경공업대학 식료공학부 졸업. 식료공학 기사자격 취득. 북한과학기술위원회 품질감독원 근무. 97년 탈북해 대한민국 입국. 호텔청소부로 남한생활 시작해 이화여대 대학원 식품영양학과 석·박사 취득. 미 국무부 2010 용기 있는 국제여성상. 현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하나여성회 공동대표. ㈔북한전통음식문화연구원 원장, 시인, 온누리교회 집사.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