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하는 난민들] 生死 갈림길… 난민 심사 좁은문

입력 2012-07-06 22:08

콩고서 온 바카켄가

난민은 인종이나 종교 또는 정치적·사상적 신념 차이로 인한 박해를 피해 다른 나라로 탈출한 사람을 일컫는다. 우리나라에도 난민 신청을 한 외국인은 지난해까지 누계로 4500여명에 이른다. 그러나 국내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290명뿐이다. 후진국에서 온 사람들이 불법체류자 신분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난민 신청을 한다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본국에서 박해를 피해 왔으나 이국땅에서도 버림받은 채 벼랑끝에서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다. 오늘도 정처 없이 유랑하는 이들을 누가 안아줄까.

“안녕하세요. 방(반)갑습니다.” 지난 3일 오후 2시. 서울 서초동 서울행정법원 앞에서 만난 콩고민주공화국 출신 델레민지 바카켄가(가명·36)씨는 어눌한 한국말로 인사했다.

그는 아내 음바웨(가명·34)씨의 행정소송 때문에 법원에 나왔다. 음바웨씨는 지난 5월 법무부 난민지위 불허 결정을 받고 이날 법원에 난민 불인정 처분 취소 청구 소장을 제출했다. 법원을 나오던 바카켄가씨는 “우리가 사는 환경이 참 어렵네요”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콩고에 남기엔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너무 컸다. 바카켄가씨는 콩고 최대 야당인 UDPS 당원이었다. 수도 킨샤사의 의학기술대에서 미생물학을 전공했고 대학 시절 부친의 권유로 정치운동에 참여했다. 2002년엔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다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가족들도 고통을 받았다. 그해 아버지는 대통령 특별 치안군에 의해 암살됐고, 이듬해 부족 간 전쟁으로 어머니와 동생들마저 잃었다. 유일한 혈육이었던 삼촌은 투옥 후 연락이 끊겼다. 홀로 남은 그는 정부군의 추적을 피해 숨어살다 결국 살기 위해 콩고를 떠나기로 했다. 정당 지도자 한 명의 소개로 2006년 관광비자를 받아 한국에 입국했다.

오후 3시20분쯤 바카켄가씨는 서울 양천구 신정동 출입국관리사무소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체류 유예 신청을 위해서다. 그는 2008년 법무부 난민 신청에서도 불허 판정을 받았다. 이어 행정소송도 냈지만 2010년 대법원에서 기각되면서 한국에 머무르는 것도 어려워졌다.

출입국관리사무소로 들어가는 그의 얼굴엔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만약 여기서도 거절당하면 그는 영락없이 불법체류자가 된다. 그렇다고 다시 콩고로 돌아갈 수도 없다. 제3국행도 불가능하다. 국제미아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난민 신청자는 최종 심사결과가 나올 때까지 ‘인도적 체류’ 차원에서 기타(G-1) 체류 자격을 받는다. 하지만 일할 권리도 없고, 한국 정부의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한다. 체류만 가능하다.

바카켄가씨는 지난 5년간 아르바이트 등으로 연명했다. 경기도 안산시의 한 지하 단칸방에서 아내, 두 살 된 아이와 함께 살았다.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해 통역일을 가끔 했지만 그것만으로 생계를 꾸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몇몇 한국인 이웃들이 이들의 딱한 사정을 보고 도와주곤 한다.

7년 전 한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꿈이 있었다. 난민 인정을 받으면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을 돕고 그들의 인권상황을 개선하는 데 보탬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는 무기력해졌다. 생계 수단도 없는 상태에서는 모든 게 허망했다.

“제 인생은 꽉 막혀 있습니다. 노숙인 같다고나 할까. 정말 가난하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요. 아내와 아이에게도 미안하고.”

40분쯤 지나 그는 출입국관리사무소 밖으로 나왔다. 표정은 밝지 않았다. 아침도 못 먹고 나왔다는 그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날씨마저 흐려지면서 예보에 없던 굵은 빗방울까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가 기댈 곳은 한 곳뿐. 유엔난민기구(UNHCR)였다. “거기서 내 사정을 말하면 들어는 주겠죠. 유엔기구니까요.” 서울시청 부근 UNHCR 한국대표부 사무실로 다시 이동했다. 오후 5시30분쯤 도착한 사무실 입구에는 ‘난민 신청자 상담은 9시∼12시30분’이라는 안내문이 걸려 있었다. 그를 위한 상담 시간은 이미 지나 버렸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사무실 직원을 불러 사정을 말했다. 상담 책임자 대신 직원이 상담을 하기로 했다. 상담을 시작하고 1시간 후 그는 터벅터벅 상담실을 나왔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별로 없어요. 하나님이 하시겠죠.”

저녁 7시쯤 그는 귀가를 서둘렀다. 어린이집에 맡겨놓은 아이를 찾기 위해서다. 한국서 낳은 아들 이름은 오인디(OintDi)라 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란다. 아이 얘기를 하자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 지하철 2호선 시청역 입구로 들어가며 손을 흔들었다. 무섭게 쏟아지던 소나기도 이내 그쳤다. 나중에 그의 체류가 3개월 연장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시한부 체류지만 그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