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조병국] 이 천사의 눈을 어찌 외면하랴

입력 2012-07-06 16:25


‘6만 입양아의 어머니’

前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장


지난달 29일 오전 10시, 경기도 고양시 탄현동 홀트일산복지타운의 완다방에는 중증장애인 14명이 한방에 모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이 기다리는 사람은 조병국(79·여·서교감리교회) 전(前)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장이다.

토요일마다 조 전 원장은 2명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이들을 위해 1시간 동안 찬양을 한다. 하모니카와 멜로디언이 전부인 단순한 선율이지만

박수를 치며 신나게 부른다. 음정이나 박자는 중요치 않다. 그저 온몸으로 찬양하고 즐거워한다.

그래서일까. 완다방 식구들은 신청곡이 많다. 한 곡이 끝나면 이곳저곳에서 찬양 주문이 빗발친다.

누군가 ‘일어나 걸으라’란 찬양을 부르자고 했다. 평생 휠체어에 의지해 온 이들도 있는데 일어나 걸으라니? 조 전 원장이 묻는다. “그럼 어떻게 일어나 걸을 수 있지요?” “마음으로 걸어요.” “기도로요.”

반주가 시작되면 다시 목소리를 높인다. 한 주간 손꼽아 기다렸을 이 시간, 찬양을 부르는 이들이나 듣는 사람들 모두 그늘 없이 표정이 밝다.

정년을 넘겨도 나는 소아과 의사

1958년 연세대 의과대학을 졸업한 조 전 원장은 62년부터 서울시립아동병원과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에서 50여 년간 고아와 입양아들을 돌봤다. ‘6만 입양아의 어머니’ ‘홀트아동복지회의 대모’라고도 불리는 그는 2008년 정년(60세)을 훌쩍 넘긴 75세가 돼서야 은퇴했다. 61년 자원봉사자로 홀트와 인연을 맺은 조 전 원장은 93년 정년을 맞았으나 마땅한 ‘후임’이 없어 결국 15년을 더 일했다. 하지만 팔순이 다 된 지금까지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일이 힘든 데다 급여도 적어서 오는 사람들이 대개 3개월 정도 있다가 그만두더라고요. 어떤 동료들은 오후 4시쯤 되면 으슬으슬 춥고 머리가 아프다며 결핵약을 먹으면서 일할 정도였으니까요. 나는 내가 좋아서 한 일이니 자랑할 것도 없지만요.”

은퇴 이후 그의 계획은 이비인후과 전문의인 남편과 신학공부를 한 뒤 무의촌에 가서 진료봉사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퇴임한 지 2년 만인 2010년 겨울,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누군가는 이곳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는 일주일에 사흘 정도 홀트일산복지타운·요양원에서 의료 봉사를 하고 있다.

그가 소아과 의사가 된 건 가족의 죽음과 시대의 아픔 때문이다.

1남6녀의 맏이인 조 전 원장은 학교 가듯 병원을 찾을 만큼 본인이 병약한 데다 동생마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탓에 어릴 때부터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6·25전쟁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조 전 원장이 피란길에서 본 대다수의 전쟁고아들은 부랑아나 거지가 됐다. 이때 느꼈던 부모의 부재에 대한 두려움은 그를 ‘세상의 가장 낮은 곳’ ‘버려지고 아픈 아이들이 모인 곳’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땐 그곳에서 얼마나 일할지 몰랐다. 소아과 의사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겠다는 거창한 목표도 없었다. 그저 ‘이 아픈 아이들이 살아나갈 수만 있다면…’이란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기적은 계속된다

하지만 현실은 조 전 원장의 소망과는 정반대였다. 버려져 비참한 모습으로 병원에 온 아이들은 너무도 쉽게 죽어나갔다. 장애 때문에 가방에 담겨져 병원 화장실에 버려진 아기, 성폭행으로 인한 과다출혈로 생사를 오가던 5세 여아, 종이상자에 담겨 미화원의 손에 들려 온 아기…. 이름도 성도 없이, 잠시 살다 죽을 운명을 가진 그 아이를 보며 그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하나님, 제발 이 아이들에게 당신의 기적이 더 오래, 자주 머물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그러던 어느 날, 장애를 가진 한 남자아이가 버려져 병원에 왔다. 구순구개열 증상으로 입술이 갈라지고 입천장엔 구멍이 난 선천성 기형이었다. 아이의 상태를 봤을 때 치료를 하더라도 양부모 찾기가 수월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미국의 한 가정이 아이를 입양하겠다고 나섰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입양도 장애아이는 보통 4명당 1명꼴로 입양된다. 그만큼 흔치 않았던 기회, 조 전 원장은 건강검진서에 서명하고 아이에게 새 부모를 찾아줬다.

자식이 없었던 양부모는 5개월 된 이 아이를 외동아들로 삼고 28세의 건장한 청년으로 키웠다. 15번의 입술과 구강 수술도 했다. 덕분에 아이는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컴퓨터 엔지니어가 됐다.

지난달 말 처음으로 모국방문을 한 아이는 친부모를 만나기 전 조 전 원장을 찾았다. 아이는 그에게 부분의치를 보이며 잇몸을 만들고 인공치아를 심기 위해서는 아직 2번의 큰 수술이 남았다고 했다. 그러고는 다시 와서 자신 같은 아이를 위해 봉사하고 싶다고 했다. 장애를 이기고 성인이 된 아이가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더듬는 것을 보며 조 전 원장은 눈시울을 붉혔다. 고난을 이긴 아이는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대를 잇는 신앙

하지만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74년 홀트에 정식으로 전담의사로 근무했을 당시 하루 평균 100여명의 환자를 치료했다. 4년 후엔 오른손 마비가 왔다. 체력뿐 아니라 가족들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왔다. 평일 진료에다 주말 봉사활동까지 다니는 ‘아내’와 ‘엄마’를 남편과 자녀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급기야 남편은 ‘보따리 꾸려 고아원 가라’는 모진 소리를 했고 자녀들은 ‘의사는 자식들과의 약속을 못 지키는 사람’이라며 원망했다.

그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생명은 하나둘씩 꺼져갔다. 스스로도 회의가 들었다. 차라리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개업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에겐 확신이 있었다. 생명을 연장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 이는 죽은 아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홀트에서 일을 못하겠다는 그를 붙잡아준 대답이기도 했고, 힘든 환경을 이겨낸 원동력이었다.

“불가능해 보였던 아이들을 통해 기적을 체험할 때마다 ‘이건 하나님의 일이구나’란 생각을 했지요. 교통사고 나서 두 다리를 잃은 아이가 어떻게 의족을 만드는 양부모를 만날 거라고 생각했겠어요. 의족을 착용한 아이가 활짝 웃는 사진을 보면서 이 말씀이 진짜라는 걸 깨달았죠.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모태신앙인 그는 선조들의 신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감리교 선교사에게 성경을 배운 목사였고, 외할아버지는 신사참배를 반대한 독립 운동가이자 장로였다. 특히 외할아버지는 전도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가난한 아이 두세 명을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살거나 친척집에 보냈는데 이는 조 전 원장의 이타심을 길러준 계기가 됐다.

그래도 아이들에겐 부모가 필요하다

동일 조건이라 가정할 때 아동병원 등 시설과 위탁가정에서 기른 아이 중 누가 더 잘 자랄까. 조 전 원장은 단연 위탁가정이라고 주장한다. 일시적인 위탁모라도 부모의 유무가 아이의 지능발달과 체격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아이들에게 있어 부모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조 전 원장이 서울시립아동병원에서 홀트아동복지회로 옮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당시 사회적 관심이나 국가지원의 부족으로 고아들을 지원하는 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시립아동병원에서 수련의로 일하는 동시에 홀트에서 봉사활동을 했던 그는 두 기관에서 한국영아들의 상황을 동시에 비교할 수 있었다. 어려웠던 시절, 조 전 원장은 정책과 예산의 한계로 살릴 수 없거나 돌볼 수 없던 고아들의 출구는 입양뿐이라고 판단했다. 그에겐 ‘고아수출국’의 오명을 피하는 것보단 아이들의 생명을 존중해 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글쎄요. 모르겠어요. 공부가 성공의 잣대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들이 얼마나 입양된 아이들만큼 제대로 자랄 수 있을까요. 모국방문한 입양아들이 사회사업가, 교사, 사업가, 목사, 의사 등의 전문직업을 갖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면 입양이 최선은 아니겠지만 차선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입양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또 있다. 고국방문한 입양아가 자기가 있던 고아원에 와서 입양하는 사례가 점차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절망에 있던 아이들이 다른 입양아에게 희망을 주는 것. 조 전 원장은 이것이 입양 50년 역사의 한 흐름이 될 것이라 조심스레 예측했다.

“앞으로 해외 입양이 중지될 것이라고 하니 성인이 돼 모국을 찾은 입양아들이 ‘그럼 우리는 입양할 수 없는 거냐’고 말해요. 아무래도 자신들이 입양됐다는 사실을 고마워하고 좋은 기회를 줬다는 생각을 하기에 그런 말을 하지 않을까요. 사랑은 받아본 사람만이 배울 수 있고, 되돌려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가 내 ‘땅 끝’이다

요즘 그는 서울 일원동 자택과 홀트일산복지타운 말리하우스를 번갈아가며 지낸다. 아무에게도 입양되지 못한 270명의 중증장애아동을 더 살뜰히, 더 건강한 몸으로 오래 돌보기 위해서다. 말리하우스는 홀트아동복지회를 설립한 해리 홀트의 딸인 말리 홀트 이사장이 장애인들과 함께 사는 집이다. 일부 공간은 해외에서 온 봉사자들이 묵는 숙소로 사용된다. 은퇴 전과 같이 그는 오전 5시30분에 일어나 부속의원에서 진료를 본다. 이전과 달라진 점은 일기를 쓴다는 것이다.

“이곳에 다시 들어온 2010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수백명의 중증장애아들을 돌보는 일과 그간 입양아들을 만났던 기억을 주로 적고 있죠. 입양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크다는 걸 알지만, 나중에 입양아들이 불행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직장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은퇴’한 장로인 그는 도대체 언제 쉴까.

“늙어서 할일 있나요. 그나마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고 찾아서 일할 수 있다는 거, 이렇게 걸을 수 있게 해 주신데 감사하며 사는 거지요. 건강이 허락되는 한, 여기서 내 손을 거친 아이들을 만나고 마음의 빚을 갚는 일에 전념할 겁니다.”

글=양민경·사진=윤여홍 선임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