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불황, 네가 뭔데] 엉뚱한 상상, 상식의 파괴… 은행 점포의 변신

입력 2012-07-06 22:07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불황이다. 은행도 비켜갈 수 없다. 굳게 닫힌 소비자들의 지갑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불황의 ‘터널’이 언제쯤 끝날지 아무도 가늠하지 못한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단 1명의 고객이라도 붙잡고, 1㎝라도 더 고객에게 다가가기 위한 몸부림. 이런 절박함이 새로운 시장을 열고, 새바람을 일으키고, 희망을 준다. 변신과 파격으로 요약되는 은행의 생존법칙이 펼쳐지는 현장을 들여다봤다.

당황스럽다. 사방을 둘러봐도 인기척이 없다. 아파트 공사현장만이 먼지를 날리며 반긴다. 가는 길도 험난하다. 공사장에서 굴러 온 자갈이 수없이 발에 차인다. 사방이 공사판인 공터에 컨테이너 박스 한 동이 덩그러니 앉아 있다. 앞으로는 이제 겨우 골격을 갖춘 아파트가 서 있고, 뒤로는 황무지가 펼쳐져 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저 공사장 현장사무소나 식당, 까딱하면 임시 화장실로 보일 정도다.

낯설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컨테이너 박스는 자신의 용도가 무엇인지 속살을 보여준다. ‘KB 국민은행’이라고 적힌 간판. 국민은행 고유색인 노란색과 흰색으로 칠해진 외관이 아니었다면 무심코 지나치기 십상이다.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이는 현금자동입출금기(ATM)가 이곳이 은행임을 증명했다.

지난 2일 찾아간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129-1번지. 2만4147가구가 들어서게 되는 대규모 신도시 개발현장 한가운데 상식을 파괴한 은행이 있다.

정확한 명칭은 KB국민은행 별내지점. 지난달 7일 처음 이곳에 자리 잡은 이 점포는 은행권 첫 ‘컨테이너’ 박스 점포다.

컨테이너 박스라고 무시하면 큰코다친다. ‘이게 되겠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예·적금 신규가입은 물론 카드·상담·환전·송금까지 안 되는 것이 없다. 고작 99㎡의 공간이지만 있을 건 다 있다. 대기번호를 발급하는 기계, 대기하면서 앉아있을 소파, 다양한 광고물과 창구 직원까지. 겉만 컨테이너 박스일 뿐 속은 온전한 은행이다.

굳이 왜 황량한 공터이고, 투박한 컨테이너 박스일까. 국민은행 고위 관계자는 ‘생존’이라고 짧게 답했다. 불황에는 단 1명의 고객도 아쉽다. 조금씩이지만 입주자가 늘어나는 데다 주변에는 변변한 은행 하나 없는 ‘신천지’다. 놓칠 수 없었다. 다만 20%도 되지 않는 입주 상황, 채 지어지지도 않은 상가를 감안하면 점포를 내는 것은 모험에 가까웠다.

해결책은 공사장에 흔하디흔한 컨테이너 박스에서 찾았다. 국민은행 최광보 차장은 “주변 상권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은행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를 고민하다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컨테이너 박스다 보니 의외의 장점도 있다. 매월 임대료를 낼 필요가 없는 등 점포 운영비가 적게 든다. 언제든지 다른 신도시 건설현장으로 갈 수 있어 재활용 100%다. 국민은행은 별내신도시에 정식 지점을 여는 다음달이면 이 컨테이너 박스를 다른 곳으로 옮길 계획이다.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의 결과는 어떨까. 고객들 반응은 꽤나 호의적이다. 인근 공사현장에서 1년째 일한다는 이종영(49)씨는 “근처에 은행이 없어서 퇴계원까지 왕복 30분을 소비하며 다녔다”며 “컨테이너 박스라고 해도 제대로 된 은행이 있어 너무 편하다”고 했다. 걸어서 5분 거리 있는 아파트에 지난달 초 입주한 주부 김모(35·여)씨도 “좁고 불편한 점이 일부 있지만 이곳이라도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말했다.

생존을 위한 상식파괴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휴대전화 등장과 함께 퇴물이 된 공중전화 박스도 변신했다. IBK기업은행은 모두가 외면하는 통에 문은 부서지고 쓰레기 투기장이 돼버린 공중전화 부스에 손을 내밀었다.

소매점포가 적어 고객 불만이 크다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성공적이다. 공중전화 점포는 이제는 도심의 명물이 되고 있다. 기업은행은 지난해 9월 서울역에 처음 설치한 이후 현재 전국에 621대를 설치했다. 오가며 쉽게 마주치는 공중전화 부스를 활용한 덕분에 고객 만족도도 높다. 기업은행은 공중전화 점포를 1000곳까지 늘릴 계획이다.

불황은 엉뚱한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항상 젊은이들로 들끓는 서울 회기동 경희대 앞에 위치한 신한은행 ‘S20 스마트존’ 경희대지점은 아예 은행이길 포기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대학생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태블릿PC’ 2대와 미러PC 2대가 반긴다. 무료 출력 서비스는 덤이다. 급하게 리포트를 인쇄할 일이 있으면 공짜로 해결 가능하다. 여느 은행에서 볼 수 있는 창구는 없다. 대신 최첨단 ATM 4대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 기계로 예·적금 및 카드 상품 가입과 각종 상담이 모두 이뤄진다. 직원은 청원경찰 1명을 포함해 3명이 전부. 영업시간은 오후 6시까지로 다른 지점보다 1시간 길다. 20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부담스러워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느낌이다.

태블릿PC를 사용하던 이상훈(29)씨는 “그저 돈을 찾으러 왔는데 태블릿PC가 있는 것이 신기해서 만져보고 있다”며 “젊은 사람들한테는 은행도 시대에 맞게 변하는 것이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했다.

미래에 주요 고객이 될 수 있는 20대를 선점하자는 바람은 다른 은행에도 번지고 있다. 우리은행도 오는 9월 초 대학생을 겨냥한 스마트 지점을 서울시내 대학 2곳에 설치할 계획이다. ‘스무 살 우리’로 이름 지은 이곳에는 현금 입출금 서비스가 없다. 우리은행은 “입출금 서비스 자리에 학자금 대출 서비스, 첨단 IT기기 서비스 등이 들어앉을 예정”이라며 “이런 파격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설명했다.

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