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영 장로 칼럼] 종교인과 신앙인 (10)
입력 2012-07-06 13:48
구원에 대한 걱정
요즘 나에게 근심거리가 하나 생겼다. 남들이 들으면 이상하게 여기겠지만 60년 넘게 교회에 다녔는데 정말 내가 구원 받을 수 있나 하는 부분이 근심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교회 목사님이나 신학자들과도 이야기해 봤다. 모든 답은 “걱정 말아라! 교회에 나오는 것 만으로도 하나님이 너를 택했다는 증거다”라고 말씀하곤 하는데 그것 만으로 이 구원의 문제가 나에게 명쾌하게 잘 와 닿지 않았다.
심지어 이야기하는 목사님마저 저분도 구원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생겼다. 믿음은 있어 보이는데 왠지 믿음이 안가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왠지 몰랐다.
목사님과 신학자, 주변의 장로님들은 모두 기도도 잘 하시고 거룩한 것 같은데 왜 이런 구원관에 대한 의심이 드는지 나를 스스로 꾸짖어 보았다.
몇 달간 계속 생각을 하다가 믿음이 있으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성경 구절이 나에게 강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있는지, 또 의심이 생겼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믿음의 객관성을 성경에서 찾았다.
갑자기 잘 보지 않던 야고보서 2장에서였다. 전에는 믿음과 행위는 구원관과는 반대 입장이었다. 절대로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설교를 너무 많이 들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이 두 관계가 하나라는 결론을 내주고 있었다. 즉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행함의 열매가 없는 사람은 믿음이 있다고는 해도 결국은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분의 구원은 확실하다고 할 수 없다. 아무리 기도를 잘 하고 교회에서 방글방글 웃고 친절하게 이야기해도 그 사람의 행위가 없으면 믿음이 없는 종교인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이 가슴 속 깊이 와 닿는다.
정말로 젊은 시절에 사랑의 열병을 앓아 본 사람은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을 생각하면 행동으로 표시가 난다.
연애대위법이란 작품을 쓴 헉슬리가 글에서 아무리 싫어하려고 해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글을 본 적 있다.
김일성 주체사상을 가진 미전향 장기수의 글에서 자신의 신념을 위해 평생 감옥을 택하고 아직도 감옥에서 고생하는 것이 힘들지 않다는 고백은 무엇을 말하는가? 공산주의 사상을 위해서도 일생을 바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고 그에 따른 행위를 그리스도인답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행위를 보고 세상 사람이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하나님을 경외케 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본분이라고 생각해 본다.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래서 내 구원의 문제를 마음으로만 아니리라는 야고보서 말씀이 진리인 것으로 다가온다. 나 스스로 내 열매를 보고 구원의 확신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귀한 일을 더 많이 해야 할 것이다.
강덕영 장로/ 한국유나이트문화재단 이사장, 갈렙바이블아카데미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