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28) 끝까지 견디는 자는
입력 2012-07-05 18:17
권력 탐욕과 불륜의 시절, 마가는 뭘하고 있었나
AD 50년부터 AD 62 년 사이 마가의 행적을 추적하려면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 제국의 정치적 상황과 그 동방 경영의 거점이었던 안디옥 그리고 유대 왕과 총독이 주재하던 가이사랴의 형편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
사람은 이미 에덴 동산을 떠날 때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버려 두고 나왔다. 처음부터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이어 주고 있던 그 사랑의 끈은 사탄 쪽에서 볼 때 가장 두려운 방해물이었다. 그래서 사탄은 그 ‘사랑’을 ‘음란’이라는 것으로 변질시키는데 온 힘을 쏟아 왔던 것이다.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 6:3, 개역한글판)
그래서 사람은 에덴 동산에서 나오자 곧 살인을 시작했다. 아담과 하와의 아들 가인은 그 아우 아벨을 죽였고, 그 살인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가인의 자손 라멕은 아다와 씰라 두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그 후로 인류의 역사는 늘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음모와 더 많이 차지하려는 탐욕과 육체를 더럽히는 불륜으로 가득 차게 되었던 것이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 제국의 정치적 상황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마 제국의 도덕적 수준은 전혀 세계를 지도하고 다스릴만큼 고상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칼리굴라 황제는 그의 모든 누이들과 근친상간을 했으며 그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누이가 드루실라였다.”(파울 프리샤우어 ‘세계풍속사’)
AD 41 년 칼리굴라가 살해당했을 때 궁전의 커튼 뒤에 숨어 있던 그의 삼촌 클라우디우스가 병사들에게 끌려나와 50 세의 나이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중풍병으로 몸이 성치 않아 첫 번째 아내와 이혼했고 두 번째 아내와도 방종한 행실을 이유로 이혼했다. 그는 자신보다 30세나 연하인 세 번째 아내 멧살리나를 맞아 아들 브리타니쿠스와 딸 옥타비아를 낳았다. 그는 황제가 된 후 성적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사랑의 여신 베누스를 숭배하며 각처에 있는 베누스 신전을 정화했다. 그리고 황후 멧살리나가 다른 남자들과 연애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멧살리나가 황제 몰래 실리우스라는 청년과 결혼식을 올리린 사실이 알려지자 황제의 심복인 해방 노예 나르키수스가 그녀를 살해했고 황제는 자신의 조카이며 칼리굴라의 누이인 아그립피나를 네 번째 아내로 맞아들였다. 아그립피나는 전남편 그나에우스 도미티우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네로가 있었다.
“클라우디우스에게는 멧살리나 소생의 브리타니쿠스라는 아들이 있었으나 자기 아들을 황제의 자리에 앉히려는 아그립피나의 농간에 넘어가 네로를 양자로 입적하고 전처 소생의 딸 옥타비아를 아내로 주었다.”(요세푸스 ‘유대전쟁사’ 2-12)
황실의 행태가 그 모양이니 로마의 모든 속주에서도 그런 일들이 예사로 벌어지고 있었다. 클라우디우스의 즉위를 도왔던 유대 왕 아그립바 Ⅰ세에게는 세 딸과 한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딸은 자신의 모친 이름을 따서 베르니케라 했고, 둘째 딸은 조모의 이름을 따라 마리암네 그리고 새째 딸은 그의 친구 칼리굴라가 가장 사랑했던 누이의 이름인 드루실라로 불렀다. 그의 아들 아그립바 Ⅱ세는 어려서부터 누이 베르니케와 근친상간의 관계를 가졌고, 그녀가 바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버니게(행 25:13)이다. 그녀는 삼촌인 칼키스 왕 헤롯과 결혼했다가 그가 죽자 다시 돌아와 오라비와 부적절한 관계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르니케는 친남매간인 아그립바 Ⅱ세와 간통을 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자 길리기아 왕 폴레모를 설득시켜 할례를 받게 하고 그와 결혼을 했다. 그러나 이 결혼도 오래 가지 못하고 다시 이혼하게 되었다.”(요세푸스 ‘유대고대사’20-8)
아그립바 Ⅰ세의 둘째 딸인 마리암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그립바 Ⅱ세는 그의 누이 마리암네를 부친이 정혼해 놓았던 헬리아스의 아들 아르켈라우스에게 시집보냈다.”(‘유대고대사’ 20-7)
마리암네는 아르켈라우스와의 사이에 딸 하나를 낳고 그와 이혼한 후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중 큰 부자이며 행정장관이었던 데메트리우스와 재혼했다. 마리암네는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아그립피누스라고 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팔라스의 형제 벨릭스를 유대 총독으로 파견하였다.”(‘유대고대사’ 20-7)
사마리아인들과 함께 유대인을 공격하여 말썽을 일으킨 유대 총독 쿠마누스가 해임되고 팔라스의 형제 벨릭스(행 23:24)가 유대 총독으로 파견된 것은 AD 48 년이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노예에게 자유를 주어 자신의 심복으로 활용한 자들 중에는 멧살리나를 살해한 나르키수스 외에도 팔라스가 있었다. 팔라스는 클라우디우스의 모친 안토니아의 심복이기도 했다. 안토니아는 전황제 티베리우스의 아우인 드루수스의 아내였고, 칼리굴라의 부친 게르마니쿠스와 삼촌 클라우디우스를 낳은 태후였다. 그런 안토니아에서 클라우디우스까지 대를 이어 충성하고 있는 막강한 팔라스의 형제 벨릭스가 유대 총독이 된 것이다.
“벨릭스는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후 드루실라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요세푸스 ‘유대고대사’ 20-7)
드루실라는 곧 아그립바 Ⅰ세의 막내딸이고 아그립바 Ⅱ세의 누이였다. 그러나 벨릭스 총독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드루실라는 이미 에메사 왕 아시수스와 결혼한 유부녀였던 것이다.
“아그립바 Ⅱ세는 에메사 왕 아시수스에게 누이 드루실라를 시집보냈다.”(‘유대고대사’ 20-7)
그러나 벨릭스 총독은 단념하지 않았다.
“이에 벨릭스는 친구인 시몬을 드루실라에게 보냈다. 시몬은 유대인으로서 구브로 출생이었으며 자칭 마법사라고 주장하는 인물이었다.”(‘유대고대사’ 20-7)
벨릭스의 부탁을 받고 시몬은 그의 현란한 화술로 드루실라를 설득해서 그 남편과 이혼하고 벨릭스와 결혼하게 만들었다. 두루실라를 이혼하게 만든 마술사 시몬이 사마리아에서 베드로에게 저주를 받은 마술사 시몬과 동일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유세비우스가 인용한 유스티누스의 편지에는 그가 기토 출신의 사마리아인이라고 기록해 놓아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에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마귀의 힘으로 당신들의 위대한 도시인 로마에서 놀라운 마술을 행하여 신으로 추앙되던 사마리아인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기토라는 마을 출신이며”(유세비우스 ‘교회사’ 2-13)
그러나 마술의 기본이 속임수 즉 트릭이고, 또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자신을 신이라고 하는 등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거짓말을 한 것까지 감안한다면 그가 자칭 유대인이라고 했든 사마리아인이라고 했든 크게 달라진 것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마술사 시몬은 정교한 마술로 문화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여 스스로 신이라 했고, 정계의 고위층과 교유하여 그 위치를 튼튼하게 했던 것이다. 마술사 시몬의 힘은 막강했으나 어쨌든 그도 역시 도덕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이었음에 틀림 없다. 그리고 탐욕은 멸망의 방으로 내려간다.
“벨릭스는 드루실라에게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아그립바라고 지었다. 드루실라와 아그립바는 후일 티투스 황제 때 일어난 베수비우스 화산의 폭발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유대고대사’20-7)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형인 게르마니쿠스의 딸이며 칼리굴라의 누이동생이고 자신의 조카인 아그립피나를 네 번째 아내로 맞아들였으나 그녀의 세력이 점점 더 커지자 자신의 위치에 대한 불안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아그립피나가 점차로 황제의 손에서 모든 권력을 빼앗아가고 있을 때 그는 브리타니쿠스를 자신의 상속자로 정하고, 네로를 내세우려는 아그립피나의 계획을 저지하기로 결심했다.”(파울 프리샤우어 ‘세계풍속사’)
그러나 이를 눈치챈 아그립피나가 선수를 썼다. 그녀는 황제가 좋아하는 버섯 요리에 독을 넣었던 것이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13 년 8 개월 20 일간의 통치를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 황후 아그립피나가 그를 독살했다고 한다.”(‘유대고대사’ 20-8)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죽고 아그립피나 소생의 네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은 AD 54 년이었다. 황제가 된 네로는 곧 클라우디우스가 멧살리나에게서 낳은 아들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했다.
김성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