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신인식 (8) 아들·딸 “시각장애 극복 아빠가 자랑스러워요”

입력 2012-07-03 17:57


가진 것 하나 없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보석 같은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것이 기적으로 여겨진다. 사실 자녀를 키우면서 아이들이 시각장애인 아버지를 콤플렉스로 여길까 두려웠다. 다행히 아이들은 누구보다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해 주었다. 우연히 딸 지혜의 일기를 보고 코끝이 찡했다.

“아빠가 없는 내 인생은 상상할 수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큰 믿음과 기도로 나를 키워주셨다. 아빠의 꿈은 다른 사람과 많이 다르다. 부자가 된다거나 명예를 얻는다거나 하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의 시각장애인들이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잘 사는 것, 하나님 나라의 큰 일꾼이 되는 게 아빠의 꿈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꿈일 수 있지만 아빠는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려오셨다. 내가 보고 자라 온 것은 큰 꿈을 그리고 어려운 상황을 묵묵히 헤쳐 나가는 아빠의 모습이었다. 나 역시 혼자만의 성공이 아닌 남을 위한 성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여행을 통해 견문을 넓히지 않고, 계속 공부해서 지혜를 쌓지 않았다면 아이들의 유학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또 내가 결심을 바로 옮기는 성격이 아니었다면 경제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을 따지다가 유학 보내달라는 아이들의 청을 들어주지 못했을 것이다. 목회자 월급으로 가계를 꾸려가기도 벅찼지만 ‘열방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라’고 말해준 자녀들에게 좀 더 넓은 세상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미국에서 공부하길 원했던 다윗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2001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헌팅턴 비치에 있는 공립학교에 다윗을 입학시켰다. 다윗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이듬해 중학교 2학년이 된 지혜도 보냈다.

두 아이 모두 낯선 곳에서 사춘기를 맞게 된다는 점이 염려됐다. ‘옆에서 늘 바라보고 챙겨줘야 하는 게 아닌가’란 불안감이 고개를 쳐들 때도 많았다. 하루에 한 번은 꼭 전화를 했다. 아이들이 귀찮아할 때도 있었고, 걱정거리가 있어 상의해 올 때도 있었다. 그 모든 순간에 전화로라도 함께할 수 있으니 감사했다. 아이들도 힘들 때나 기쁠 때나 감사기도를 드린다고 했다. 다른 유학생들과 달리 계속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는 점도, 아르바이트 때문에 방학이 되어도 한국에 오지 못한다는 점도 아이들의 감사기도에 들어가 있다고 했다.

아이들은 신앙으로 똘똘 뭉쳐 어려움을 이겨나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그래도 1년에 6만 달러가 넘은 사립대학의 비싼 등록금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아이들은 일단 학비가 저렴한 커뮤니티칼리지에 입학한 후 UCLA 3학년으로 편입, 1년 3개월 만에 조기 졸업했다. 다윗은 통역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현재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다니고, 지혜는 한동대 로스쿨에 다니고 있다.

자녀를 키우면서 나는 비로소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35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내가 앞을 보지 못했을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인식아 네가 볼 수 있다면 내 눈 줄게”란 말을 입고 달고 사셨다.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눈을 주신다고?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런 말을 하시는 거지. 그럴 리 없어’ 그런데 다윗이 5살 때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쳤을 때 울면서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제 다리를 드릴게요. 아이의 다리를 낫게 해주세요.” 시각장애인인 내가 다리까지 쓸 수 없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겠지만 진심으로 내 다리를 주고 싶었다. 그제야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돼 눈물로 회개했다.

또한 언제나 나를 믿고 뭘 해도 잘했다고 하셨던 어머니는 내 인생의 가장 큰 힘이다. 내가 앞을 볼 수 없게 됐다는 말에 나보다 더 절망하셨지만 어머니는 의연함을 잃지 않으셨다. 어머니가 흔들리셨다면 아마 나는 바로 서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어머니가 얼마 전 소천하셨다. 효도하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린다.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