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내적인 빛’에 따른 삶을 산 퀘이커교의 창시자 조지 폭스 (下)

입력 2012-07-02 18:26


“광신자” 낙인 핍박 속에 퀘이커교 신대륙에도 정착

조지 폭스는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하지만 퀘이커 교리를 전파하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가난한 서민계층에서부터 시작한 퀘이커 운동은 귀족들을 포함한 사회 전 계층으로 퍼져나갔다. 이렇게 될 때까지 열성적인 퀘이커 교도들의 헌신적 도움이 있었다.

그 중 ‘퀘이커교의 어머니’로 불리는 마거릿 펠은 폭스의 설교를 듣고 열성 퀘이커 교도가 됐다. 그녀는 친우회(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의 초기 멤버가 되어 퀘이커교 최초의 여성 설교자이자 전도자로 활약했다. 1652년 폭스가 얼버스틴 교회에서 예배를 방해한 일로 체포될 위기에 놓이자 그를 숨겨 주기도 했다. 그녀 자신도 서약 거부와 집회령을 어기고 집에서 집회를 열었다는 죄목으로 1664년에 투옥되어 오랜 옥고를 치렀다. 1668년에 석방될 때까지 그녀는 옥중에서 종교 팸플릿과 서한들을 썼다. 그녀가 쓴 유명한 작품은 성경에 기초해 여성 사역을 주장한 ‘정당한 여성의 발언’이다.

이 글은 17세기 여성 리더십과 남녀 평등과 관련한 중요한 텍스트 중 하나다. 그녀는 이 글에서 영적 평등이라고 하는 퀘이커 교리의 기본 전제에 기초해 성적 평등을 주장한다. 그녀는 하나님은 모든 인간 존재를 창조했고 따라서 여성과 남성은 내적인 빛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선지자가 될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그녀는 남편과 사별한 후 1669년에 조직 폭스와 결혼했다.

폭스는 퀘이커 교도의 수가 불어나자 조직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1653년부터 60명 이상의 선교사들을 영국 전역에 보내 퀘이커 공동체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1654년에 런던, 브리스톨, 노르위치에 지회가 만들어졌다.

또한 궤이커교도들은 1656년에 대서양을 건너 미국의 매사추세츠로 가서 궤이커 교리를 전파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 먼저 와있던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충돌했다. 퀘이커교도들은 성령의 직접적인 영감을 주장했고 영감을 받은 사람은 모두가 설교자라고 주장했다. 청교도들이 볼 때 그들의 주장은 주관적이며 과격했다. 청교도들은 그들을 이단으로 간주해 경고했다. 이단을 영혼을 죽이는 사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퀘이커 교도들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추방당했다. 추방에 불복할 경우 사회 선동죄로 처형될 수 있었다. 퀘이커 교도들은 추방당했지만 다시 들어와 그들의 교리를 전파했다.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그들이 사회의 법을 무시한다는 죄명으로 퀘이커 교도 4명을 처형했다. 퀘이커 교도들은 왜 그런 행동을 한 것일까? 그들은 그 일이 자신이 시켜서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켜서 한 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즈음 본토의 퀘이커 교도들은 또 다시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1660년 찰스 2세가 귀국해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찰스 2세는 크롬웰에 의해 참수당한 찰스 1세의 아들이다. 그러니 찰스 2세가 어떤 종교 정책을 펼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는 다시 국교회 정책을 폈다. 폭스는 1660년에 구속됐다. 나라를 어지럽히고 국왕의 원수인 동시에 퀘이커 당의 강력한 지지자이자 광신자라는 혐의였다. 폭스는 이 혐의에 대해 반박하는 글을 국왕 찰스 2세와 의회 앞으로 보냈다.

“나는 국왕의 원수가 된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땅 위에 사는 어느 누구와도 원수가 된 일이 없습니다. 나는 모든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 안에 삽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찰스 왕이 구원받아 진리에 관한 지식을 알아 주님을 경외하게 되어 모든 것을 만들고 지어내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를 받아들인다면, 국왕은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도록 명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폭스는 이후에도 찰스 2세에게 편지를 보내 용서와 자비를 베풀라고 간청했다. 찰스 2세는 폭스가 군사적 반란이나 정치적 야심이 없다는 것을 안 후 감금 20주 만에 그를 석방했다. 또한 폭스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 크롬웰 치하에서 감금됐던 700명의 퀘이커교도들을 풀어줬다.

그러나 퀘이커교도들이 찰스 2세에 의해 다시 탄압을 받게 된다. 극단적 청교도 분파인 제 5왕국파가 1661년 1월에 일으킨 무장봉기 때문이다. 이 일로 찰스 2세는 모든 종교 분파와 비국교도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퀘이커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찰스 2세는 1662년에 ‘통일령’을 내려 국교회를 따를 것을 명령했다. 찰스 2세는 1664년에 또 다시 ‘제1집회령’을 내려 사적으로 5인 이상이 모여 예배하는 것을 금했다. 그리고 선서를 거부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비밀집회법’을 제정했다.

정부의 탄압이 있다고 하지만 퀘이커교도들은 공개적인 모임을 중단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따라야 하기에 맹세나 서약을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1661년에 통일령을 어긴 3170명 이상의 퀘이커 교도들이 투옥됐다. 그 중 400여명이 옥중에서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벌금형을 받아 파산했다.

폭스는 가혹한 시련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가혹한 시련은 사람을 단련시키고 단단하게 만든다. 폭스는 시련에 굴복하지 않으려면 퀘이커 교도들을 더욱 단련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있던 사계회(quarterly meeting)와 월례회(monthly meeting)를 조직해 전국의 친우회원들을 훈련시켰다. 폭스는 전국을 다니면서 퀘이커 조직을 다졌다. 폭스는 그 과정에서 기존 국교회와 마찰을 빚거나 서약을 거부해서 여러 차례 투옥됐다. 투옥 뒤에는 계속 집회 여행을 떠났다. 투옥과 여행을 반복하던 그는 결국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일시적으로 눈과 귀가 멀기도 했다.

그는 새로운 개척지 아메리카에 대해서도 관심을 쏟았다. 탄압이 뜸해지자 1671년부터 73년 사이에 서인도의 바베이도스, 자메이카, 메릴랜드, 뉴저지, 롱아일랜드, 로드아일랜드를 방문하였다. 그는 광대한 북아메리카의 지역을 찾아다니며 집회를 열어 친우회원들을 격려했다.

퀘이커교가 신대륙에 정착하기까지는 해군제독 월리엄 펜 경의 아들 월리엄 펜의 역할이 컸다. 그는 1666년 퀘이커로 개종하여 신대륙에 퀘이커 정착지를 건설할 결심을 했다. 그는 1677∼78년 약 800명의 퀘이커들을 뉴저지로 보냈다. 1681년 찰스 2세로부터 펜실베이니아를 불하받았다. 찰스 2세는 그의 부친에게 진 빚 대신에 그 땅을 불하해 준 것이었다. 1682년 퀘이커교도들은 그곳에 ‘형제애의 도시’라는 뜻의 필라델피아를 건설하여 퀘이커 도시를 만들었다.

1683년에 폭스는 또 다시 잠시 체포됐다 풀려났다. 폭스의 건강은 더욱 악화됐다. 그러나 그는 런던 집회에 계속해서 참여했고 종교적 핍박에 대해서 의회에 항의를 계속했다. 1685년에 찰스 2세가 죽고 새로운 왕 제임스 2세가 즉위했다. 제임스 2세는 가톨릭교도였다. 가톨릭교를 부활시키기 위해 비국교도에 대한 종교 관용정책을 폈다. 덕분에 약 1500명의 친우회 회원들이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가톨릭 복고를 꾀하고 절대주의적 경향을 강화하자 개신교도들로 구성된 의회는 1688년에 명예혁명을 일으켰다.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고 개신교도인 네덜란드의 월리엄과 메리가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다. 명예혁명 뒤에 1689년 관용령이 공포됐다. 관용령은 비국교도들도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제 퀘이커 교도들은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됐다. 폭스가 원했던 집회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것이다. 그러나 폭스는 관용령이 선포된 지 2년이 채 못 된 1691년 1월 13일에 사망했다. 그는 런던의 퀘이커 집회에 참석하고 난 저녁에 사망했다. 임종시에 남긴 말은 이것이었다.

“나는 결백하다. 나는 완전히 결백하다.”

그의 시신은 번힐 필즈 가까운 곳 묘지에 안치됐다. 폭스는 하나님과의 떨리는 만남을 가져 보지 못한 채 생계를 위해 ‘뾰족 집’에서 직업적으로 설교하던 목회자들에게는 커다란 도전이었다.

그가 주장한 퀘이커교 교리는 분명 주관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색채가 짙다. 성경 말씀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관적 황홀경에 매몰되거나 광신으로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고 해도 하나님과의 떨리는 만남이 없다면 그것 또한 죽은 믿음이 아닌가.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