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신인식 (7) 눈 아닌 음악으로 본 세상은 더 아름답고 따뜻

입력 2012-07-02 18:35


4살 이후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캄캄하다. 하지만 눈 대신 몸과 마음을 열어 온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은 언제나 진실하고 밝다.

특히 음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때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내가 처음 음악을 접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아코디언 연주를 처음 들었는데 천상의 소리가 있다면 바로 이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연주해 보고 싶었다. 선생님은 절대 빌려 줄 수 없다고 하셨다. 고장을 낼까 싶어 그러셨을 텐데 나는 음악선생님과 교장선생님을 조르기 시작했다.

6개월이 지났을 때 음악선생님이 “그렇게 좋으면 조심해서 딱 한 번만 연주해보렴”이라고 말했다. 영하 15도의 겨울. 너무 추워서 펴지질 않는 손가락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빈 교실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했다. 소리도 제대로 낼 줄 몰랐지만 마음속으로 이미 아름다운 연주가 시작됐다.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화장실 가는 것도 참고 연주했다. 한참 연주하고 있을 때 교실 문이 열렸다.

“인식아 아직도 하고 있니. 그렇게 좋으냐. 그럼 언제든지 네가 하고 싶을 때 해라. 아까 교장선생님이 가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만세!”

소망이 간절하면 이뤄진다. 이후 다른 악기에도 관심을 갖고 피아노, 트럼펫, 기타, 드럼 등 각종 악기들을 익혔다. 볼 수는 없어도 들을 수 있으니 음악의 세계에 있을 때 나는 장애를 느낄 수 없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은 한국시각장애인선교회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방향으로 이뤄졌다. 한국비전선교중창단이 울릉도 군민회관에서 노래할 때가 기억에 남는다. 장시간에 걸친 자동차 여행과 뱃멀미에 다들 기진맥진해 과연 노래를 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손을 맞잡고 기도드린 후 무대에 올랐을 때 우리는 각자의 목청에서 솟아나오는 뜨거운 힘을 느꼈다.

단원들은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간절하지만 하루하루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생업이 또 있으니 연습 시간을 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간신히 시간을 맞추고 숨 가쁜 연습을 하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했으니 안마나 침술 등의 생업을 하던 분들로서는 더욱 피곤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모든 피로가 노래 부른 후의 보람과 행복에 눈 녹듯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행복중창단’이라는 별명을 얻은 우리는 2005년 ‘국회개원축하음악회’와 2008년 ‘국회개원 60돌과 정기국회개원축하음악회’에서 노래했다.

한국시각장애인선교연합회가 지난 5월 18일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한 ‘시각장애인을 위한 빛 사랑의 소리’ 연주회 마지막 순서에 내가 무대에 올랐던 것도 잊지 못할 순간이다. 김남윤씨가 지휘하는 W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여기에 모인 우리’를 불러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또한 음악은 내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해주었다. 1984년 10월, 서울 강서구에 있는 온누리교회 부흥성회에서 특송을 했다. “울고 있는 형제여 왜 찬송을 잊었는가. 어둠 속의 찬송은 기적을 부른다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의 문을 찬송으로 열었다오….”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는 나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그날 하나님께선 특히 몇 사람에게 나의 모습을 깊이 각인시켜 주셨다. 큰처남인 김일환 목사가 당시 그 교회 담임 교역자였다. 집회엔 아내뿐 아니라 장인 장모님이 참석해 계셨다.

후에 들은 이야기이다. 부흥회가 있던 그날 밤, 김일환 목사가 여동생을 불렀다고 했다. “오늘 찬양하던 그 청년 보았니. 그 청년과 결혼해서 일평생 그를 섬기지 않겠니. 하나님께서 오빠에게 그런 감동을 주셨다.”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했던 여동생은 망설이지 않고 자신도 그런 감동을 받았다며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녀가 바로 나의 아내 김민희 사모이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