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샘] 비를 기뻐하며

입력 2012-07-02 18:21


비가 내렸다. 실로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단비다. 발전을 거듭한 농기계도, 지방마다 마련된 저수지와 댐도, 기후의 이변 앞에서는 무력하다.

사람에 따라 고구려나 백제의 멸망, 심지어는 조선의 멸망이 가뭄과 무관하지 않다는 가설을 지지하기도 한다. 이전 시대에 가뭄의 위력이란 국가의 명운에 영향을 줄 정도로 막강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대에는 가뭄을 단순한 기후 현상으로 보지 않고, 위정자의 덕은 물론 당대 정치의 잘잘못과 연관시키려 하였다.

은나라 때에 7년이나 가뭄이 들었다. 탕왕은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삼아 상림(桑林)의 들녘에서 기우제를 지내며, 자신을 자책하였다. “정치가 번잡해서인가. 백성이 생업을 잃어서인가. 궁실이 화려해서 그런 것인가. 혹 뇌물이 횡행해서인가. 혹 아첨하는 자가 많아서인가?” 상고시대의 일로 치부하고 말기엔 자책의 말이 너무나 준열하다.

‘춘추’ 희공(僖公)3년 조에 “6월에 비가 내렸다(六月雨)”라는 짧은 기록이 있다. 이를 곡량전에서 “비를 기뻐한 것은 민생에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喜雨者有志乎民者也)”라고 해석하였다. 단비의 기쁨은 물론이고 당시 위정자들의 참되고 절실한 마음이 세 글자에 선명하다.

장유의 노래처럼 풍년이 들고도 남을 단비다. 도시에서 쌀과 채소를 사 먹는 나로서는 ‘나라 곳간이 넉넉해지면, 내 먹을 것이야 없으랴?’ 했던 이규보의 노래가 피부에 와 닿는다. 논바닥 따라 갈라졌던 내 마음에도 다시 푸른 물결이 찰찰하다.

이규필(성균관대 대동문화硏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