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시를 쓰고 시로 그림을 그리다
입력 2012-07-01 18:09
화가 박정민, 시인 이생진과 이메일 주고받으며 작품활동
제주도 서귀포시 이중섭미술관 창작스튜디오의 ‘2011년 입주작가’로 활동한 박정민(51) 여성 화가는 ‘그리운 바다 성산포’로 유명한 이생진(83) 시인과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그림을 그렸다. 지난해 5월 서귀포에서 열린 이생진 시인의 시낭송회에 우연히 참가한 것이 인연이 됐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이메일은 해류가 돼 인생의 바다를 돌고 돌아 한 편의 시화(詩畵)로 거듭났다.
“제주의 아침은 새소리로 시작합니다. 도심 속에서는 그저 상상만 하던 일이죠. 주위에서는 (서울에 사는) 가족을 두고 1년씩이나 어떻게 떠나가 있느냐고 걱정과 부러움을 동시에 보냈지만, 전 지금쯤은 제 삶에 쉼표가 필요했습니다. 어느 날은 짙은 안개가 마을까지 내려와서 신비스럽습니다. 그런 날은 걷고 또 걷습니다.”(박정민)
“많이 걸으세요. 나는 아침 6시만 되면 바닷가를 걸었습니다. 외로움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뭔가 합니다. 아니 지더라도 남는 것이 있습니다. 시의 자원은 외로움이 제일입니다. 성산포는 전복죽이 맛있다고들 하는데 내게 제일 맛있는 것은 고등어에 들어있는 고독입니다. 고독에서 무슨 소리가 날 때 그것을 메모했습니다.”(이생진)
화가는 시를 그림으로 그리고 시인은 그림을 시로 썼다. ‘자전거 여행’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보자. 남녀 한 쌍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자전거를 타고 있고, 주변의 나무들이 반갑다고 머리 숙여 인사를 건네는 듯하다. 바다 가운데에는 작은 섬 하나가 외롭게 놓여 있고, 다리 옆에 피어난 꽃들에는 나비들이 날아와 놀고 있다.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공간이다.
“가파도와 우도에 갔다 왔다는데 박수를 보낼게요. 고갱이 섬 마르티니크로, 타히티로, 마르케사스로 가듯 나는 지금도 방랑의 지팡이와 낭만의 여운으로 떠돌 수가 있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시인이 보낸 이 글은 화가의 붓질에 의해 ‘새들의 섬’이라는 작품으로 형상화했다. 남녀가 섬의 해변에서 말을 타면서 여가를 즐기고 있는 그림이다.
‘천지연폭포’ ‘엉또폭포’ ‘정방폭포’ ‘외돌개 사랑’ ‘성산일출봉’ ‘섶섬’ ‘범섬’ ‘문섬’ ‘삼매봉 언덕’ ‘보목리 포구’ 등 제주 곳곳의 지명을 딴 작품들은 화가가 시인과의 교감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청보리밭’ ‘자전거 여행’ ‘빨간 하늘’ ‘감귤 향기’ ‘목장의 오후’ 등 제주의 이미지를 담은 그림들도 시인의 감성과 화가의 미감이 화음을 이룬 결과물이다.
이렇게 그려진 작품들이 4일부터 9일까지 서울 관훈동 인사아트센터에서 ‘그림이 시가 되다’라는 타이틀로 전시된다. 이번 전시에서 박정민 화가는 세 가지 시선으로 본 서귀포의 삶을 이야기한다. 화가의 시선으로 섬 생활과 제주 사랑에 관한 이야기, 여행자의 시선으로 자유롭게 사색하고 고독을 느낀 이야기, 여성의 시선으로 사랑 만남 꿈에 관한 이야기를 따스한 그림과 함께 들려준다.
시인은 화가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그림을) 보고 또 봤습니다. 박 화백을 통한 제주의 아름다움이 더욱 아름다웠습니다.” 4일 오후 6시 전시 오픈 때 배우 이영하의 진행으로 이생진 시인의 시낭송과 첼리스트 홍성은의 연주가 곁들여진다. 시인과 화가는 이메일 내용과 그림을 엮어 ‘시가 가고 그림이 오다’(사진갤러리 류가헌)라는 시화첩도 공동으로 펴냈다(02-736-1020).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