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신인식 (6) 시각장애인 잡지·심부름센터… 궁핍에도 늘 은혜가
입력 2012-07-01 18:06
1979년 서울에 올라온 후 한국맹인재활센터 교사로 일하면서 시각장애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이 일을 하면서 시각장애인의 가장 큰 불편은 아무래도 정보의 부족이라고 여겨졌다. 어떤 일을 할 때 방법을 알고 있으면 어떻게든 노력할 수 있지만 방법을 알지 못하면 미리 포기하게 된다. 당시 인터넷 정보 검색의 신속성이 높이 평가 받고 있었고 그 다음이 책자 형태의 자료였다. 그런데 시각장애인에게는 두 방법 모두 불가능했다. 일자리를 구하고 싶어도 정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잡지를 구상했다. 녹음테이프로 만들어져 귀로 듣는 ‘사랑의 메아리’가 탄생했다. 유명인사의 인생이야기, 소록도에서 온 편지 같은 경우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다고들 하셨다. 덕성여대 박동현 교수님의 과학상식, 김정태 박사님의 성이야기, 정연희 작가님의 음성 녹음 등,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찾아다니며 담았다.
제작비용도 없으면서 한 호 한 호 만들어가는 게 기적 같았다. 살 집이 없어 한 달에 집을 서너 번이나 옮겨 다니며 살던 시절이었다. 당장 살 집의 전세금으로 제작비를 충당하고 친구 집을 전전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늘 마음을 함께해 주는 분들이 있어서 그 많은 일들이 가능했다. 녹음과 제작, 배송까지 함께 해주던 분들, 미친 짓이라며 말리던 분들도 일이 이뤄지는 것을 보면서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자금이 바닥날 때면 중간 중간 멈추어가며 5년간 34호까지 발간할 수 있었다.
1981년 시각장애인을 위한 심부름센터를 시작했다. 100일 철야기도를 두 번이나 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후에 시작했다. 자원봉사자 250명을 모았다. 시각장애인들이 원하는 일을 대신 해 드리는 게 목표였다. 예상대로 할 일은 산더미였다. 쇼핑대행, 민원서류 처리 대행, 편지, 대필, 도서 등 종류도 다양해서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분주했다. 하루에 평균 100건 이상씩 처리했다. 언젠가 정부가 이런 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될 거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헛되지 않게 지금은 지역별로 시각장애인 심부름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센터를 운영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자금 문제였다. 자원봉사자들에게 기본적인 차비나 점심 값은 지급해야 했는데 그것조차 넉넉하지 못했다. 1984년까지 치열하게 운영했지만 더는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문을 닫아야 했다. 수족이 잘려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빚은 늘고 몸은 쇠약해졌다. 사람에 대한 불신과 원망이 마음을 괴롭혔다. 출구가 없는 감옥에 갇힌 것 같았다.
당시 감사가 부족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그러지 못했다. 일도 즐겁고 보람도 컸지만 늘어가는 빚이며 사람들의 오해에 100% 감사하지 못했다. 지금도 직원들에게 급여를 주는 것만으로 매달 빠듯해 35개월째 나의 급여는 챙길 수 없지만 그래도 이젠 기쁘고 감사하다. 내가 가장 소망하던 일을 하고 있으니 그걸로 된 거다.
1986년 한국시각장애인선교회를 설립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시각장애인을 이해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볼 수 없는 내가 듣고 노래하면서 행복을 느끼듯 많은 사람이 음악을 통해 행복을 느끼길 바랐다. 시각장애인으로 구성된 한국비전선교중창단의 활동도 큰 주목을 받았다. 나를 포함해 모두 여덟 명의 멤버들이 연습할 때면 즐거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곤 했다. 볼 수 없지만 노래할 수 있는 음성이 있으니 우리는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들인가. 교회나 병원 기관 등에서 노래를 했다. 우리들의 노래에 뭔지 모를 따뜻함이 담겨 있다고 했다. 노래를 듣고 나면 볼 수 없음에도 불평하지 않고 이토록 삶을 열심히 살아 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더 즐겁게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지 반성한다는 말씀들도 하셨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