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한장희] 불황 마케팅
입력 2012-07-01 18:41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겪은 후 유통업체들은 승용차, 순금, 해외여행권 등을 경품으로 내걸고 고객 끌어들이기에 나섰다. 아파트를 경품으로 내놓은 곳도 있었다. 패스트푸드점에도 즉석복권이 등장할 정도로 경품 마케팅은 당시 대유행이었다. 같은 제품이 인근 상가나 마트보다 싸지 않으면 환불해준다는 할인점들의 최저가보상제와 한 개 가격에 덤으로 하나를 더 주는 ‘덤 마케팅’도 당시부터 시작됐다. 자동차 회사나 이동통신사는 신제품을 팔기 위해 가족, 친척까지 동원하는 ‘안면 마케팅’에 치중했다. 이제는 모두 고전이 된 마케팅 기법들이다.
소득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진 2000년대 중반부터 마케팅 트렌드에 변화가 생겼다. 구매력이 높은 고소득층을 표적으로 한 귀족마케팅과 수익구조를 우량고객 위주로 재편하는 ‘디마케팅(demarketing)’이 업계의 새 조류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유통업계, 은행 등은 큰손들에게 VIP를 넘어 VVIP 서비스를 제공하고, 가전제품도 고가와 저가 브랜드가 나눠졌다. 한 자동차 회사는 ‘대한민국 1%를 위하여’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구매층을 스스로 한정하기도 했다. 와인과 웰빙 열풍도 당시부터 본격화했다.
반면 다른 한편에선 가격을 9900원, 4900원 등으로 책정해 상대적으로 싼 느낌을 주게끔 하는 ‘100원 마케팅’이 한창이었다. ‘5년 전, 10년 전 가격으로 드린다’는 패밀리 레스토랑이 등장하고, 리필 제품도 인기를 끌었다. 경품도 물건이나 여행권보다 현금을 내거는 경우가 늘어났다.
소득 양극화에 따른 트렌드 변화와 별개로 날씨 마케팅도 큰 주목을 받았다. 제품을 구매한 고객에게 ‘성탄절에 눈이 1㎝ 이상 쌓이면’ 등의 조건을 내걸어 경품을 주거나 할인을 해주는 마케팅 기법이다.
유럽발 재정위기가 글로벌 실물경제로 급속히 옮겨가고 있는 요즘은 ‘노 세일’을 추구하는 명품 브랜드들마저 세일 행사를 진행하는 경우가 잦다. 세일은 명품 이미지를 추락시킬 수 있다는 위험 부담이 크지만 굳게 닫힌 고객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심지어 주요 백화점들도 17일간 진행했던 여름세일을 이번에는 꼬박 한 달간 진행한다. 정기세일에 앞서 실시된 7일간 브랜드 세일까지 합하면 무려 38일간 ‘세일 대장정’을 펼치는 셈이다. 할인 폭도 최대 90%까지라니 “이래도 안 살 겁니까”라고 읍소하는 모양새다. 확실히 불황은 불황인가 보다. 또 어떤 기발한 불황 마케팅이 등장할지 자못 궁금하다.
한장희 차장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