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6) 비텐베르크, 은혜의 하나님

입력 2012-07-01 17:58


용감했던 개혁자 루터, 하나님 앞에선 은혜받은 ‘거지’였다

루터 여행은 종착역을 향하고 있었다. 최종 목적지인 비텐베르크로 가는 길에 아이스레벤에 들렀다. 아이스레벤은 루터가 태어나고 세례받고 죽은 곳이다. 우리나라 읍 장터 정도의 작은 시장을 지나 루터가 세례받은 교회, 루터가 태어나고 살았던 집, 그리고 어린 루터가 다녔다는 교회에 들렀다.

어린 루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드디어 비텐베르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도시가 주는 무게가 느껴졌다. 비텐베르크는 멜랑히톤과 함께 루터가 묻힌 곳, 무엇보다 종교개혁의 봉화를 높이 든 95개 조항이 새겨진 곳이다. ‘루터하우스’에 들어갔다. 루터가 1508년부터 살고 활동했던 곳으로 1883년부터 루터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루터박물관에는 루터에 관한 1000여점의 원본들이 전시돼 있다. 그중에서도 몇 가지 중요한 것이 눈길을 끌었다.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면죄부통, 루터가 직접 설교했다는 강단(이 강단에서 루터는 면죄부를 비판하는 등 2000회 이상 설교했다고 한다), 1524년까지 마지막으로 입었던 루터의 수도복,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 초판, 그리고 지하에 있는 루터의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의 발자취 등이다.

또 루터박물관에는 루터가 한 중요한 말들이 새겨져 있었다. “Wo Christus ist, geht er allzeit wider den Strom(Where Christ is, there he always goes against the flow·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언제나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일이 있다).” “The true treasure of the Church is the most holy gospel of the glory and grace of God(교회의 진실한 보화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가장 거룩한 복음이다).”(루터가 쓴 95개항 중 62번 논제다) “Trust in God, and do whatever you want(하나님을 믿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

그러나 가장 감명 깊은 루터의 말은 루터가 임종하기 직전에 한 말이다. “We are beggar, it is true(우리는 모두 거지다. 그것은 사실이다).” 왜 루터는 자신을 ‘거지’라고 했을까. 임종을 앞둔 시점에서 그가 거지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거지’라는 단어가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 거지는 은혜받은 자의 표상이다. 거지는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살 수 없다.” 루터는 사람 앞에는 용감했던 개혁자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거지였던 것이다. 먼 길을 돌고 돌아 루터는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은혜받은 거지임을 깨달았다.

루터가 평생에 걸쳐 발견한 은혜의 하나님, 그 하나님은 사랑받을 만하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라 우선 사랑하고 사랑받을 만한 자로 만드는 하나님이시다. 사람들은 자신을 의인으로 보지만 하나님 앞에는 누구나 죄인이다. 반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누구나 의롭다. 하나님은 죄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지만 그들을 받으신 후 그가 원하시는 모습대로 그들을 만들어 가신다. “우리는 받아들여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이것이 은혜다. “하나님이 받아들인 나를 내가 받아들인다.” 이것이 믿음이다. 이 은혜와 믿음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것을 내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향해 심중의 믿음을 붙잡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따라서 오로지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루터) 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에서 아무 공로 없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방해 없이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다. 루터가 가톨릭의 성례전을 거부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오직 은혜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어떤 다른 장애물 혹은 중보자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 외의 다른 중보자는 없다. 이것을 위해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1520년 10월)를 썼다. 루터는 이 책에서 로마 교회의 성례전을 비판하면서 로마 교회의 성례전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교회가 동행하며 통제하는 수단으로서 모든 중요한 행동과 사건을 사제의 권위 아래 두는 제도라고 말했다. 루터는 이 제도를 현대판 바빌론의 ‘포로(captivity)’로 비유했다.

성례전의 오류와 남용으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 루터는 7가지 성례 중 세례와 성찬만 받아들이고 5가지(견신례, 혼례, 안수례, 고해성사, 종부성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제의 배타적 중재권은 당연히 거부된다. 금욕적 고행주의도 마땅히 받아들일 수 없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우위성과 만인제사장주의는 그 대안으로 제시된다.

그렇다면 루터의 은혜는 모든 인간적 노력과 훈련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가. 그렇지 않다. 루터의 은혜와 자유가 역사적으로 육신적인 사람들에게 무절제의 구실이 된 것은 사실이다. 육신적 인간들이 은혜를 남용하여(롬 6:1), 자유를 육체의 기회(갈 5:13)로 삼은 것이다.

그 결과 개혁의 반율법주의적 경향과 공중도덕의 퇴보, 심지어 폭력적인 농민전쟁까지 발생했다. 교파의 난립과 분열, 개인주의적 경향도 개혁의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부작용으로 드러났다. 그것은 지금까지 세계교회 특히 한국교회를 망치는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루터가 그렇게 가르쳐서 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권위’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던 로마 교회에 대하여 ‘자유’의 원리를 새로운 지배의 원리로 제시한 개혁의 비고의적 결과였다.

그나마 그것은 루터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부터 있었고 로마 교회에서도 충분히 나타난 문제였다. 루터의 은혜는 그리스도안에서의(in) 자유에서 오는 것이지 그리스도로부터의(from) 자유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없는 은혜는 생각할 수도 없다. 믿음은 은혜의 자녀이지만 동시에 선행의 어머니이다. 선행은 칭의의 조건이지만 또한 그것의 필연적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우리는 믿기 때문에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선행과 훈련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좋은 뿌리에서 좋은 열매가 나오듯이 좋은 믿음의 뿌리는 반드시 좋은 선행의 열매를 낳는다. 뿌리가 좋으면 반드시 좋은 열매도 맺는 것이다. 뿌리 안에 열매가 있듯 믿음 안에 선행이 있다. 루터 자신의 말이다. “믿음은 선행을 해야 하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렇게 묻기 전에 이미 선행을 행할 뿐만 아니라 항상 선행을 하고 있다. 믿음과 선행을 분리시키느니 차라리 불과 빛을 분리시키는 것이 낫다.”

그가 ‘그리스도인의 자유’(1520년 10월)에서 했던 말이 결론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그리스도와 이웃을 위해서 산다. 그는 믿음으로 자기를 넘어(above himself) 하나님에게 이르고 그리고 사랑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자기보다 아래로(below himself) 내려간다.” 그렇다. 진실로 우리는 거지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한순간도 살 수 없다. 그것은 루터에게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 모든 믿음과 사랑이 있다.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