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정보보호협정 보류] 한국 외교사 ‘희대의 해프닝’

입력 2012-06-30 00:38

우리나라 외교사에 희대의 해프닝이 벌어졌다. 29일 아침 일찍 이명박 대통령이 결재한, 일본과 오후 4시 서명하자고 시간 약속까지 해놓은 한·일 정보보호협정이 서명 시간에 임박해 전격 보류됐다. 여당까지 가세한 ‘밀실 처리’ 비난 여론에 청와대와 정부가 외교적 결례와 망신을 감수하며 굴복한 것이다. 이날 오전 협정 체결 보도자료까지 배포했던 외교통상부의 한 당국자는 “외출했다 오후에 돌아와 보니 세상이 바뀌어 있더라”며 정부 방침이 급선회한 상황을 표현했다.

◇결국 뒤집힌 ‘꼼수’=한·일 정보보호협정은 지난 26일 국무회의에서 기습 통과됐다. 차관회의는 거치지 않았고, 통과된 뒤에도 공개하지 않았다. 청와대는 17일 이명박 대통령의 남미 순방 전에 이를 보고받고 사전 재가를 내린 터였다. 통과 사실이 알려진 뒤 반대 여론이 거셌지만 29일 아침 이 대통령은 협정안을 결재했다. 오후 4시 일본 도쿄에서 신각수 주일대사와 겐바 고이치로 일본 외상이 서명할 예정이었다.

오후 2시쯤 새누리당 지도부에서 공식적인 반대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상황이 급변했다. 김성환 외교부 장관은 급히 청와대와 전화로 조율에 나섰다. 청와대 내부에선 “서명을 강행하자” 목소리가 여전했지만 결국 보류키로 의견을 모아 일본 측에 이를 알리며 양해를 구한 게 서명 약속 시간을 1시간쯤 남겼을 때였다. 외교부 조병제 대변인은 협정체결 예정 시간인 오후 4시를 불과 10분 앞두고 보류됐음을 공식 발표했다. 김성환 장관은 오후 8시 일본 겐바 외상에게 전화를 걸어 보류된 사정을 설명해야 했다.

26~29일 나흘간 빚어진 해프닝을 놓고 “밀실 처리에 이은 졸속 보류” “레임덕 정부의 한계”란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정부가 외교 결례를 무릅쓰고 서명 보류를 결정한 데에는 여당의 압박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동시에 일본과의 군사협정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간단치 않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절차상 문제마저 드러나자 일각에서는 협상 체결을 강행할 경우 ‘제2의 쇠고기 파동’ 우려까지 제기됐다.

◇앞으로 어떻게 되나=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국회에 충분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겠다”며 “한·일 양국이 절차를 다 마쳤기 때문에 안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국회에서 관련 상임위(외교통상통일위와 국방위)가 구성되는 다음 달 9일 이후 설명 절차를 밟아 협정 체결 일정을 진행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협정을 체결키로 국회를 설득한다 해도 서명은 다음 달 하순에나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일본의 7월 방위백서(독도 영유권 주장 포함) 발표, 8월 광복절 행사, 12월 대선을 앞둔 양국 일정을 고려할 때 이번 협정을 현 정부 임기 안에 체결하기는 어려우리란 전망도 나온다. 민주통합당은 정부의 협정 체결 보류 직후 논평을 통해 “완전 철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원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