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27)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입력 2012-06-28 18:05


“멸망이 가까운줄 알라…” 예수님 예루살렘 환난 미리 보시고 눈물

마가가 베드로의 구술을 기록한 복음서에는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와 예비책에 관해 예수가 하신 말씀이 매우 간단하게 적혀 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막 13:14)

그러나 비교적 여러 사람들로부터 자료를 수집한 누가는 더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누가는 예수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 분이 우셨다고 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눅 19:41)

복음서에 예수가 눈물을 흘리셨다고 기록된 것은 두 곳 뿐이다. 후일 요한이 기록한 복음서에서는 그분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 이르렀을 때 눈물을 흘리셨다 했고, 누가의 기록에서는 예루살렘에 도착했을때라고 돼 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눅 19:42)

그분은 예루살렘의 마지막 모습을 미리 보셨던 것이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눅 19:43-44)

보살핌 받는 날이란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을 의미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을 나타낸다. 마가복음에 비해 누가복음에는 예수가 성전이 파괴될 것을 언급하는 대목이 더 자세히 묘사돼 있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눅 21:20-22)

그날의 참상에 대해서도 누가는 마가의 기록에 몇 줄을 더 첨가했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눅 21:23-24)

600년전 바빌론에 잡혀갔다가 귀환한 유대인의 학사와 제사장들은 당시 그 환난의 원인이 율법을 지키지 못한 데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벼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스 9:10)

그래서 유대인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데 힘썼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다시 제사장들과 율법사들은 권력과 자리에만 관심이 있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그들은 물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막 11:28)

예루살렘이 장차 또 환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은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았다.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막 12:6-8)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았으니 예루살렘의 환난은 이제 피할 수 없게됐다. 그러나 마가가 볼 때 예루살렘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수만 명이나 있었다.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그러나 예루살렘 자체가 산 위에 있는 도성이었다. 시온산과 모리아산은 모두 성 안에 포함되어 있었고, 예루살렘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성 밖의 산이라면 동쪽의 감람산 뿐이었다. 그리고는 모두 남쪽의 광야와 서쪽의 바다를 향해 내려가는 ‘골짜기’들만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 밖의 언덕 등으로 도망한다고 해도 예루살렘이 포위된 상황이라면 역시 살아남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산이란 무엇인가?”

유대의 산들은 대부분이 석회암이어서 그 성분 중의 백해석이 물에 녹으면 자연 동굴이 형성되고, 긴급할 때의 피난처도 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산이라는 말은 피난처, 묘지 또는 요새나 진지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것을 설명해 주듯 누가는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눅 21:21)

그러므로 예수께서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신 것은 급히 성을 빠져나가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마가에게 그 때의 긴박한 상황을 말해 주었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막 13:15-16)

필자의 소설에서 마가는 그동안 아가보 선지자가 예언한 기근의 때에 대비하여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에 유리와 섬유와 가죽 제품들을 생산하는 공장을 조성하고, 그것들을 수출한 대금으로 곡물을 수입해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도왔다. 그러나 이제는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날에 대비해 새로운 거처를 준비하고 성도들을 이주시키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성을 빠져 나가되 갈 곳이 있어야 했다. 가만히 있는 새를 하나님께서 먹일 수 없듯이, 가만히 있는 성도들을 하나님이 끌어낼 수는 없었다. 누군가가 그들이 기거할 장소를 마련하고 그들을 데려가야 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는 수만 명의 성도들 중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필자의 추측대로 마가가 부친의 사업을 되살리고 판매망을 확충했더라면 유대지역을 휩쓴 대기근에서 예루살렘 공동체를 보호하고 지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고 대규모 이주를 추진할 사람 역시 마가뿐이었을 것이다.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막 13:18)

소설 ‘마르코스 요안네스’에서 마가는 AD 50년 바울의 제2차 선교 여행에 따라가지 않고, 외삼촌 바나바와 함께 다시 구브로에 가서 바보 즉 파포스 항에 판매 거점을 설치했다. 그리고 다시 동방 교역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바벨론으로 갔다가 거기서 베드로를 만났다. 그는 베드로를 설득해 그의 구술을 ‘마가복음’에 기록했고, 다시 베드로의 부탁으로 그가 바벨론 동북 지역의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 ‘베드로 전서’를 받아 썼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마태에게 자신이 기록한 마가복음의 사본을 전달했다.

“마태와 누가가 마가를 의거하면서 이를 보충하였다.”(최세창 ‘마가복음’)

AD 50 년 바울의 제2차 선교 여행에 나섰던 누가는 더베와 루스드라를 거쳐(행 16:1)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네압볼리로 건너가 빌립보로 들어갔다. 빌립보는 누가의 연고지였고, 그가 의학을 공부한 도시였다. 바울이 그곳을 떠날 때 누가는 그대로 빌립보에 남아 교회를 이끌고 있었다. 마가는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빌립보에 가서 누가에게 직접 마가복음의 사본을 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빌립보는 로마와 마게도냐를 이어 주는 중요한 거점 도시였기 때문이다.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행 16:12)

그 후에 마가는 어디서 무엇을 하였을까? 그가 AD 62 년 로마에 가서 바울을 만나 무엇인가 중요한 부탁을 받고 골로새 교회에 갈 때까지(골 4:10) 아마도 그는 예루살렘 성도들이 이주할 새로운 거처를 어딘가에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김성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