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신인식 (5) 돈을 벌자! 시각장애인들의 ‘영적 눈뜸’ 위해
입력 2012-06-28 21:02
신문을 돌리려면 매일 8∼10㎞ 거리를 걸어야 했다. 지국 총무는 “앞을 못 본다고 대강 넘어갈 생각 하지 말라”고 했다. 보통 2, 3일이면 길을 파악하는데 내겐 특별히 1주일 시간을 주겠다고 했다. 총무가 길을 알려 준 그날 밤에 혼자 가서 복습했다. 이틀 사이 같은 길을 네 번 다닌 셈이다. 3일째 되는 날, 혼자 배달하겠다고 선언했다. 총무는 “뵈는 게 없으니 겁도 없느냐”고 화를 냈지만 나는 “할 수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분은 내가 길눈이 아주 밝다는 것을 모르고 계셨다. 그러나 당시 내가 모르고 있던 것이 하나 있었다. 내가 담당한 150집이 신문을 그만 보고 싶어 하는 ‘절독 위험 고객들’이란 사실이다. 혼자 신문배달을 시작한 날, 마지막 집 신문까지 무사히 넣고 휘파람을 불며 돌아서는데 누군가 내 손목을 잡았다. 총무 아저씨였다. 불안해서 내 뒤를 따라온 것이다. 수고했다며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그는 “한 집도 안 틀렸다. 3시간 10분만에 배달 완료면 초짜치고는 신기록”이라고 했다. 매일 새벽 3시30분에 일어나 4㎞를 걸어서 지국에 도착해 신문을 차곡차곡 챙겨 나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한 달이 지나도록 신문 구독을 철회하는 집이 없었다. 철회는커녕 옆집 뒷집을 소개해 주어 내 담당은 조금씩 늘어갔다.
지국 사장님이 불러서 갔다. 내 손을 잡으시고 손바닥에 봉투 하나를 얹어 주셨다. 뭔가 두툼했다. 고맙다는 인사부터 드렸다. “고맙기는 내가 더 고맙다. 네 덕분에 신문을 계속 보겠다고 하시는구나. 그렇게 잘 해낼 줄 몰랐다” 너무 좋아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주시는 월급이었다.
사실 나는 ‘꿈에도 소원’이 잘사는 것이었다. 너무 가난하게 살았기에 돈을 벌고 싶었고, 그 돈으로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그런데 차츰 생각이 변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복음의 광명’을 찾아주고 싶었다. 그들의 영적인 개안(開眼)을 위해 사는 것이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잘살고 싶은 마음은 하나님께 반환했다.
1978년 ‘한국맹인서비스센터’를 세우고 장애인을 위한 구체적인 일을 시작했다. 시각장애인들의 경우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갓난아기 때부터 부모가 아닌 누군가에게 맡겨져야 한다. 자원봉사자 15명을 모아서 대구 시내에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자녀를 돌보기로 했다. 우리의 첫 봉사대상은 알코올에 중독된 시각장애인 부부였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와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 둘을 자원봉사자들이 순번과 역할을 정해 도왔다. 청소, 과외, 학교 선생님과의 상담, 방과 후 놀아주기 등 할 일이 다양하게 많았다.
1년 후 아이들에게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났다. 학교에서 유치원에서 생활습관이 좋아졌다. 학습능력도 빠르게 향상됐고 더욱 중요한 것은 아이들과 부모의 관계 회복이었다. 아이들은 부모의 장애를 덜 부끄러워하게 되었고 부모 역시 아이들을 방관하지 않았다. 진정한 가족으로 변화됐다. 입소문이 나서 많은 곳에서 서비스를 원했다.
처음 봉사를 요청했던 가정의 어머님을 최근에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님은 내 손을 잡고 우셨다. 아이들이 너무나 훌륭하게 성장했다면서 그 모든 게 오래전의 도움 덕분이라고 했다. 그게 꼭 우리의 도움 때문만은 아님은 잘 안다. 우리에게 도움을 청할 정도로 그분들이 열린 마음이었고 우리와 함께 하는 시간 동안 변화되는 아이들을 통해 그분들이 스스로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장애인 사회가 발전하려면 그들의 자녀들이 올바르게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시각장애인 부부의 자녀들은 부모의 충분한 사랑을 받기 어렵다. 사춘기 자녀들은 열등감이 많다. 어른이 된 후에도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시각장애인 사회는 비전이 없다. 나는 시각장애인의 자녀를 돌보고 기르는 ‘모세조기교육센터’를 세우는 꿈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해 지금도 기도하고 있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