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신인식 (4) 문교부장관 만나 “시각장애인도 일반高 입학을”

입력 2012-06-27 17:54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학교 숙직을 2년 동안 서며 월급을 받았다. 매일 40여장의 연탄을 갈고 교무실과 복도를 청소했다. 시각장애인이니 어려울 거라고 예상했지만 썩 잘 해냈다. 연탄불을 한번도 꺼뜨린 적이 없었다. 내가 숙직을 서는 동안 도둑도 들지 않고 안팎으로 깨끗했다고 하니 꽤 훌륭한 숙직 당번이 아니었나 싶다. 월급은 당시 어려운 집안 살림에 아주 요긴했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대구광명학교는 초중고등학교 과정이 있는 학교이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다. 정안인들과 함께 배우고 싶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 무렵이 고입 연합고사가 부활되던 시점이었다. 그런데 시각장애인들에겐 시험 응시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해서 학교를 졸업한들, 어려운 기술을 배우고 익혀 나간들 정안인들의 사회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없을 것 같아 절망스러웠다. 그냥 앉아서 한탄만 할 수는 없었다.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할 것 같았다. “우리 힘을 모아 읍소라도 하자.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깨진 계란의 흔적이라도 바위에 남지 않겠니” 친구들을 설득했지만 다들 싫다고 했다. 무더운 여름, 정부 청사를 물어물어 찾아 갔다. 문교부 장관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다. 어지럽고 목이 탔다. 다음날 또 갔다. 그 다음날도 또 갔다. 며칠 째였을까. 드디어 장관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장관님 기회를 주십시오.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아직 모르시지 않습니까? 기회를 주지 않으면 시각장애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문 하나가 닫히는 게 아니라 삶의 문이 닫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만약 장관님의 자제 분이 장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암흑 속에 방치하실 겁니까?”

장관님은 연신 “그렇지 그래”라며 나의 말을 이해해주셨다. 하지만 결론은 그렇지 않았다. 때를 기다리자고 했다. 쉽게 될 일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슴이 답답했다. 결국 일반고교 입시를 치를 기회를 얻지 못해서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대구 광명고등학교로 진학해야 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마음이 급해졌다. 벌이가 좋던 전화교환원 일, 숙직일도 끝났다. 뭘 해서 돈을 벌어야 할지 궁리하느라 잠을 설친 어느 날 아침 교무실에 들어갔다.

코로 맡아지는 잉크 냄새,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 바로 이거다. 신문 배달을 하면 되겠다 싶었다. 수업시간과 일하는 시간이 겹치지 않으니 공부에 방해될 것도 없고 다리품을 팔아야 하니 건강에도 좋고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닌가. 그날 모 일간지 대구지국을 찾아갔다. 더듬더듬 문을 열고 들어가 옷깃이 스친 사람에게 책임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신문배달을 하고 싶어왔다고 하니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혹시 장님 아니가 이거보이나?” 내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혀를 찼다. “살다 살다 별일을 다보네. 앞도 못 보면서 배달 일을 한다고? 그냥 돌아가라.” 누군가 내 등을 떠밀었다. 다음날 또 갔다. 누군가 또 등을 밀었다. 나가지 않겠다고 버둥거리니 또 한 사람이 와서 양팔을 잡아끌었다.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아서 나를 밀어 넣었다. 다음날 수업이 끝나면 거기 가서 앉아있었다. 책임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지만 아무도 대답을 안했다. 그래도 갔다. 일주일 후에야 지국 사장을 만날 수 있었다.

“사장님. 월급은 안받을 테니 신문 배달만 좀 하게 해주세요. 소원입니다. 저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렇게 간청하니 기회는 한번 주마. 영리하게 생긴 녀석이 왜 이리 무모한 짓을 하려는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우리 직원들이 너 때문에 불편해지거나 고객이 너 때문에 불쾌해하시면 당장 그만둬야 한다. 알겠니.”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