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파푸아뉴기니 문성 선교사] (21) 십자가의 능력 (두 번째 이야기)

입력 2012-06-27 17:53


‘살인하지 말라…’ 10계명 가르치자 말씀의 능력 일어나

“선교사님 하나님에게 여쭤 주십시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분이시고 말과 생각을 바꾸지 않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축복으로 주신 아들을 죽이라고 하십니까. 우리는 돼지가 많은데 돼지로 대신 죽이면 안 되는지 하나님께 여쭈어봐 주십시오.”

아!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며 신뢰인가. 저들은 이전에 한번도 성경을 읽거나 들어 본적이 없다. 그러나 추장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듣고 알았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의 믿음이 되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무지를 또 깨달았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사건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 없는 지식일 뿐 나는 하나님의 지식에는 무지했다.

추장의 질문은 신실하신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 사랑이신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인정하는 놀라운 믿음의 질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요 신앙이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무척 부끄러웠다.

다음날 마크 쥬크 선교사가 하나님이 스스로 이삭을 위하여 숫양을 예비하셨다는 내용을 일러주자 추장은 벌떡 일어나 “그러면 그렇지 좋으신 하나님이 결코 축복으로 주신 아들 이삭을 죽이지 않으실 거야”하며 기뻐했다. 추장은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목 부족에서 제일 먼저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은 성도가 됐다. 할렐루야!

하루는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적질하지 말라’라는 십계명을 가르쳤다.

그러자 부족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어떤 사람은 양쪽 다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고 두려워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 갔으며 어떤 사람은 무섭다며 떠나지 않으려 했다.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마음에 큰 혼란이 생겼다. 하나님께서 죄를 모르는 우리에게 죄인인 것을 알게 하신 말씀의 능력이 일어났구나라는 생각보다 왜 저들은 저렇게 두려워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저들은 저렇게 두려워하는데 선교사인 나는 어떤 영적 두려움도 생기지 않는가. 짙은 회한이 밀려들었다. 부족의 형제들에게는 계명이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갔는데 나는 오직 지식으로만 알고 있을 뿐 심령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나의 본능은 죄로 인해 타락했다. 나는 계명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내 안에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말씀의 능력이 일어나지 않아 죄를 자복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버지, 아버지의 말씀을 지식과 관념 속에만 두고 있는 죄인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가슴이 뜨거워 지기를 원합니다.

십여 년 동안 복음을 바르게 가르치고 성경번역을 하기 위해 부족 형제들의 사회 문화 경제 정치 종교 그리고 영적인 부분 등 여러 분야를 조사하고 분석하였지만 그들의 어떤 부분이 나와 얼마나 다른 지는 알지못했다.

부족 형제들을 통해 나의 영적 문제를 찾기를 원했다. 그런데 부족 형제들과 나와 큰 차이점을 발견했다. 이것이 분명한 이유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문제의 핵심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것은 죽음과 죽음의 공포에 관한 것이었다.

부족 형제들은 언제나 죽음의 공포 속에 살아간다. 감기나 식중독이 걸려도, 설사를 하거나 피부병이 생겨도 죽음에 두려움에 떤다. 악령은 물론 모든 문화가 죽음과 연결돼 있다.

그런 부족 형제들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들을 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 것은 당연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인이 되었고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고 죄인을 반드시 심판하시며 죄인은 정령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의식속에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평생을 아무 의식 없이 행하고 당연한 것으로 알고 한 일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두려워했다. 사람을 직접 죽이거나 죽이는 자리에 동참하고, 간음과 남의 것을 훔치는 일이 일상이었다.

부족 사람은 사람을 죽여도 죄의식이 없다. 돼지 몇 마리를 주면 그만이다. 간음이나 성폭행이라는 말은 우리의 윤리이고 도덕이지 그들에게는 삶의 일부분이다. 아버지의 아이를 낳고 사는 여인,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낳는 여인이 무수하다.

훔칠 때도 죄의식이 없다. 다만 자신 소유 물질이나 자기 여자가 해를 당하면 싸우고 분노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죽이고 싸우는 것이다.

부족 남녀의 삶은 동물적이다. 이성이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그들을 바라보며 나 또한 이성이 얼마나 감정의 지배를 받는지 발견하며 자복한다.

부족의 형제들과 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나는 삶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살아가는 것이며 죽음은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 왔다. 죽음의 공포를 모르고, 잊고 살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과 심판과 지옥은 다만 관념 속에만 자리 잡고 있었다.

부족 사람이 나와 다르다는 것은 그들은 죄인이고 나는 죄인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죄 성이 다르다는 것이다. 부족 사람은 더욱더 본능적이며 자신들의 감정에 따라 살아간다. 인간이 본능에 충실할수록 죄악이 드러난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 부족 형제들을 보면 그들은 죄인 다운 생각과 삶을 살아 가고 있는 것이다. 즉 죄인이 죄인다운 것이다. 그래서 더 은혜에 가까이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죄인이면서 감정과 본능에도 충실하지 못한 위선적이기까지 한 죄인이다. 체면과 지식으로 나의 죄를 합리화하고 은폐하려고 한다. 나는 부족의 형제보다 더 악하다.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나는 참으로 소망이 없는 자이다.

누가 사랑하는 자녀의 비참한 죽음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기뻐할 수 있겠는가. 고통 속에서 기뻐하려고 애를 쓴다면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죄인이면서도 죄인답지 못하며 더 가증한 죄인이 아니겠는가.

산상수훈의 말씀은 물론 성경의 말씀은 의지와 신념으로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 보혈만 의지하라고 주신 은혜의 말씀이다.

우리는 극한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는 물론 하나님을 찾을 능력이 없는 죄인이다.

자녀의 죽음을 보는 순간 “아버지 왜 내 아들입니까. 이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믿지 않겠습니다.”라며 감정에 따라 하나님을 향해 분노와 항의와 슬픔을 토해내고 슬픔이 지나고 나면 자복하고 주님의 용서를 구하는 모습이 더 죄인 다운 행동이 아니겠는가.

나의 문제는 죄인이 죄인 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죄인이면서도 나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한 준비도 두려움도 의식하지 못하며 죽음은 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 간다는 것이다.

아버지, 나를 감싸고 있는 죄에서 자유 하게 하옵소서.(계속)

● 문성 선교사

문성(60) 선교사는 아내 이민아 선교사와 함께 20년째 파푸아뉴기니 선교를 하고 있다. 지병 박리성대동맥류 때문에 인공동맥을 차고 있다. 선교지 코라 부족은 식인을 할 정도로 원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