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내적인 빛’에 따른 삶을 산 퀘이커교의 창시자 조지 폭스 (中)
입력 2012-06-25 18:10
진리 붙잡고 전쟁과 노예제 반대 설교로 사람들 마음 움직여
브라운이라는 사람이 임종 때에 조지 폭스에 관한 중요한 예언을 했다. 내용은 조지 폭스가 주님의 도구로 쓰이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브라운의 장례식에 온 사람들 중에는 믿지 않는 이들도 있었지만 막상 조지 폭스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폭스는 일기에서 당시 자신의 외모는 물론 내면의 정신까지 바뀌는 등 크게 변모했다고 적었다. 그가 이렇게 변화한 것은 ‘내적인 빛’의 체험 때문이었다. 주변에 수많은 신앙고백자들과 목회자들이 변화된 조지 폭스를 보러 찾아왔다.
폭스는 이같은 종교체험 이후 1647년부터 진리를 전파하러 다녔다. 동행자들도 생겼다. 그들은 ‘친우회’ 또는 ‘친구들’로 불렸다. 폭스는 기도하며 전도를 했다. 그는 성령의 인도 속에 기도를 했다.
그가 1648년 맨스필드에서 기도를 마치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그곳에 모인 몇몇 사람들은 사도들이 살던 시대의 사람들이 기도할 때 집이 흔들렸던 것처럼 집이 흔들리는 것 과 같은 경험을 했다. 폭스의 기도 후에 다른 사람이 기도를 했지만 잠잠했다. 사람들은 조지 폭스에게 다시 기도를 부탁했지만 그는 사람의 의지로 기도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사람들은 폭스의 기도 속에 하나님이 동행한다고 느꼈다.
폭스는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 영국 전역을 돌아 다녔다. 영국 곳곳을 다니기 시작한 초기에 그는 레스터 지역의 어떤 대집회에 갔다가 논쟁에 휘말렸다. 그곳은 장로교, 조합교회, 침례교, 국교회 교인들이 모두 모여 있는 자리로 종교 논쟁을 위한 현장이었다. 목사들은 설교단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서 목사들은 설교와 강연을 했다. 설교와 강연이 끝난 후 한 여성이 설교자에게 물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살아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라고 성서에 쓰여 있는데, 이 말은 어떤 뜻입니까”
설교자는 당황한 듯 대답했다.
“나는 교회에서 여자가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조지 폭스는 이 대답이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설교자는 교회에서는 “누구든 말할 수 있다”고 설교했기 때문이었다. 폭스는 여성의 입을 막은 목사에게 질문했다.
“목사님, 당신은 이 뾰족집(steeple-house)을 교회라고 하십니까. 아니면 여기 함께 섞여 있는 군중을 교회라고 하십니까”
폭스는 교회에서는 누구든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목사에게 교회의 본질에 대해 물은 것이다. 목사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대신 폭스의 의견을 물었다. 폭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교회는 살아 있는 돌, 곧 살아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영적인 집으로 진리의 기둥과 초석이 되는 곳이며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는 곳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섞여 있는 군중의 머리도 아니시며 석회나 돌이나 나무로 만든 오래된 집의 머리가 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폭스가 이렇게 말을 하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결국 목사는 설교를 중단하고 설교단에서 내려와 가버렸다. 그리고 사람들도 따라 나갔다. 대집회는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호텔로 돌아와서도 폭스는 흥분한 목사들과 교인들과의 논쟁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완고했다. 참된 교회의 머리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며, 그분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폭스는 이 일이 있은 후 대성당이나 집회 장소에 대해서는 ‘뾰족집’이라 불렀고, 드물게 ‘영적인 신앙 공동체’에 한해서만 ‘교회’라고 했다. 폭스 이후로 퀘이커들은 자신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곳을 ‘모임 집(meeting-house)’이라 불렀다.
폭스는 계속해서 진리를 전파하러 다녔다. 그가 진리를 전파하러 다니던 시기는 정치적 혼란기였다. 정치적인 의도는 없었지만, 그의 설교는 민감한 정치적 내용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는 신약성경과 내적인 빛에 따라 성도에게 검소한 의식주 생활을 권하고, 어떠한 맹세나 무력의 사용, 군대 입대를 금하며 전쟁은 불법적이며, 노예제도는 정의롭지 않다고 설교했다.
그가 맨스필드에 있을 때였다. 그곳에서는 노예에 관한 재판이 열렸다. 그는 노예를 임금으로 학대하지 말라는 주의 말씀을 듣고 재판관을 찾아갔다. 재판관들은 많은 노예들과 함께 있었다. 그는 재판관들에게 노예들을 학대하지 말고 오직 옳고 공정하게 그들을 대우하라고 권고했다. 노예들에게도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고 정직하게 주인을 섬기라고 충고했다. 놀랍게도 재판관들은 그의 말을 들어 주었다. 그는 이것이 모두 주 그리스도가 이끄셔서 된 것이라고 믿었다.
폭스는 이 일이 있고 난 후, 몇몇 법정과 뾰족집을 찾아다니며 노예에 대한 억압과 서약 제도를 중단하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올바르게 행할 것을 경고했다. 그의 설교와 기도는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었다. 그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 중에는 노예 주인이자 악명 높은 포주 및 술꾼인 악덕 사기꾼이 있었다. 설교가 끝난 뒤 그는 폭스의 뒤를 쫓았다. 놀란 폭스에게 그가 건넨 말은 뜻밖이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마치 세차게 얻어맞아 지금 나는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소.”
믿기지 않겠지만 이 일이 있고 난 후 이 악인은 정직하고 착실한 사람이 됐다. 이만큼 폭스의 설교는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그 힘은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 잡은 ‘내적인 빛’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폭스는 설교와 기도를 통해 사람들 가슴 속에 꺼져 있던 그 빛을 점화시켜 타오르게 한 것이었다.
폭스의 진리 전파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심각한 정치적 혼란을 겪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의 행동과 설교는 반란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오해와 모함을 받았다. 폭스는 1649년에 노팅험의 한 교회에서 성령이 모든 권위의 길잡이라고 설교하다가 처음으로 투옥 됐다.
특히 맹세를 거부하는 그의 행동은 커다란 논란거리였다. 영국 정부에서는 1662년에 ‘퀘이커교도라고 하는 특정한 사람이나 맹세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일으킬 수 있는 사고나 위험을 막기 위한’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는 맹세를 거부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맹세를 하지 못하도록 설득하는 행위는 대체로 불법이며, 하나님의 말씀과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선언되어 있다.
재판관들은 폭스에게 영국 국왕의 주권과 그에 대한 충성을 승인하는 맹세를 강요했다. 그러나 폭스는 “평생 한번도 맹세를 한 적이 없으며, 약속이나 계약을 맺은 일도 없다”면서 맹세를 거부했다.
폭스가 맹세를 거부하는 이유는 매우 분명했다. “나는 맹세하는 것에 충성하지 않고, 진리와 신뢰할 수 있는 것에 충성합니다. 나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데 하물며 왕이라면 말해 뭐하겠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맹세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제가 지금 그리스도의 말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말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결국 폭스는 수감됐다. 그는 1649년에서 73년까지 여러 번에 걸쳐 모두 8년간 구금 당했다. 그러나 그는 타협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성경말씀과 내적인 빛에 따라서만 움직였다. 그만큼 그는 순수한 인물이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