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정철훈] 양들의 침묵과 시인 백석
입력 2012-06-25 18:45
북한 양강도 삼수군은 예부터 오지 중의 오지이자 악명 높은 유배지였다. 고산 윤선도(1587∼1671)가 73세 때인 1660년,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이 서거하자 3년 복상(服喪)을 할 것인가, 1년 복상을 할 것인가를 놓고 논쟁하던 중 1년 복상을 주장하는 송시열 등 서인(西人)의 배척을 받아 5년 동안 유배된 곳이 삼수군이다. 고산이 삼수군에서 쓴 시 가운데 ‘만한첨지(挽韓僉知)’가 있다. “내가 삼강에 귀양 온 지 이미 4년인데/ 공(公)은 성(城) 안에 한번도 들어온 적 없구려/ 나는 외려 노인장께서 지(止)를 앎을 보나니/ 조정에서는 정재상이 있었고 향촌에서는 공이 있었네”(‘국역 고산유고’)
삼강은 삼수군을 지칭한다. 고산은 유배지에서 알고 지낸 한첨지가 세상을 뜨자 만가(輓歌)를 지어 망자에 대한 예를 갖춘다. ‘지(止)를 앎’이란 구절은 중용에 나오는 대목으로, 머물러야 할 곳에 머물 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정재상’은 한양에 사는 판서 정세규인데, 고산은 그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음을 알고 이렇게 썼던 것이다. 한첨지와 정재상은 머물러야 할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흔치 않은 인물이었다. 송강 정철, 노계 박인로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사 문학인으로 꼽히는 고산은 우리 나이로 85세의 장수를 누렸으나 그의 일평생은 유배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삼수군은 시인 백석(1912∼1996)이 말년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1958년 당성이 약한 인민들을 지방 생산현장에 보내는 ‘붉은 편지’ 사건을 계기로 백석은 삼수군 관평리 국영협동농장으로 쫓겨나 양치기로 연명했다. 지난주 출간된 ‘백석문학전집2’(서정시학)에는 백석이 삼수군에서 쓴 미공개 산문 ‘관평의 양’이 실려 있다. “당의 붉은 편지를 받들어 로동 속으로 들어온 내가 이러한 관평의 양들과 관련을 가진 것은 나의 분외의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양들 속에서 나의 로동은 시작되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나는 기쁜 노래 부르며 달려가고 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나는 밤이고 낮이고 당 앞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있다.”(‘문학신문’ 1959년 5월 14일)
아동문학에서의 주체성 문제를 놓고 논쟁하던 아동문학분과위원장 이원우에게 밀려 삼수군으로 쫓겨 온 백석은 당성을 회복하며 붉은 작가로 단련되고 있음을 읍소(泣訴)하고 있다. 하지만 복권은 죽는 날까지 이루어지지 않았고 무려 37년 동안이나 북풍한설 몰아치는 삼수군에서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조선시대에도 오지로의 유배는 10년을 넘기지 않고 이배(移配)하는 것이 통례였음에 비춰 37년은 너무도 가혹한 세월이 아닐 수 없다. 고산도 29세 때인 1616년, 예조판서 이이첨을 탄핵하는 소(疏)를 올려 미움을 산 끝에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갔다가 1년 만에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된 적이 있다. 이에 비해 백석은 강산이 세 번 반이나 바뀌는 동안 삼수군을 벗어나지 못했다.
후배 시인 김종삼(1921∼1984)이 시 ‘올페’에서 “나는 죽어서도/ 나의 직업은 시가 못 된다/ 우주복처럼 월곡에 둥둥 떠 있다/ 귀환 시각 미정”이라고 노래했듯 양치기로서의 백석도 수백 마리의 양들이 귀가 따갑도록 울어대는 가운데 문득 내면의 문을 두드리는 침묵의 순간을 경험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백석은 1962년 6월 ‘아동문학’에 평문 ‘이소프와 그의 우화’를 끝으로 절필하고 만다. 시인 백석이 아니라 양치기 백석이라니. 그 역시 ‘지(止)’를 알았던 것일까. 제 곡조를 못 이기는 말년의 백석은 양들의 침묵을 휩싸고 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