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신인식 (2) 11세에야 미션 初校 입학… 방과후는 껌·볼펜 팔이
입력 2012-06-25 18:03
앞을 보지 못하는 아이라고 부모님이 나를 집에만 있게 하거나 안쓰러워만 했다면 나는 평생 아무 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해보라고 하셨다.
어린시절 우리 집은 너무나 가난했다. 병석에 누우신 아버지 대신 어머니 혼자 동분서주하셨고 생활은 점점 더 기울어 갔다. 어떻게든 먹고사는 일에 도움이 되어야 했으므로 할 수 있는 건 뭐든 했다.
동갑인 아이들이 학교 갈 나이가 되고, 아침마다 학교 가자며 연신 내 이름을 불러도 나는 일만했다. 새로운 걸 들으면 하고 싶어서 몸살이 날 지경인지라 무엇이든 어떻게든 배우고 익혔다. 내가 하는 일이 밥이 된다는 생각을 하면 신났다. 소도 몰고 논도 갈고 벼 묶기, 모심기, 지게질도 수준급으로 했다. 새끼줄도 많이 꼬았는데 솜씨가 좋아서 우리 집 새끼줄은 다른 집에서 꼭 챙겨달라고 할 정도였다.
친구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해 4학년이 될 무렵 학교에 너무 가고 싶었다. 그 시절 장애인들은 교육이랄 게 없이 소외되고 방치된 채 지냈는데, 그런 형편의 학생들을 찾아다니는 선생님들이 계셨다. 우리 집을 방문한 선생님들은 시각장애인들을 별도로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며 나를 학교에 보내라고 설득하셨다.
1967년, 11세가 되던 그해 드디어 대구 광명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미션스쿨이었는데 1학년 담임선생님이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소개해주셨다. 젊고 예쁘신 선생님이 최고로 인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 같았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나 역시 최고로 쳐 드려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알게 된 하나님은 내 평생 동안의 빛이 되어 주셨다.
늦은 입학을 한 탓에 덩치는 크고 또래 아이들보다 생각하는 것도 빨랐다. 뭘 해서 돈을 벌까 늘 고민하고 다녔는데 길에서 껌이나 볼펜을 팔면 돈을 남길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역으로 나가 껌과 볼펜을 팔았다. 시외버스정류장에서 신문이나 잡지도 팔았는데 첫날부터 날개 단 듯 잘 팔렸다.
어느 날 누군가 등을 툭 툭 쳤다. “잡지책 드릴까요?”라고 말하는데 주먹이 날라 왔다. 그리고 어디론가 나를 끌고 가더니 집단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장사를 하려면 일부를 바치거나 그게 아니면 여기를 떠나라고 했다. 실컷 맞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원 응급실이었다. 온몸은 아프고 코피를 흘렸는지 코가 얼얼하고 이가 흔들거렸다. 그래도 울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다음날 팔러 나갔고 또 맞았다. 그 다음날도 나가서 또 맞았다. 그러기를 몇 차례하고 나니 그들은 나를 독한 놈이라고 불렀다. 사는 꼴이 불쌍하니 건들지 말자고 했다. 뭐든 끝까지 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1970년대 초에는 전화가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학교에 전화교환원이 있었다. 평소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인 나는 전화교환원이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다. 수업이 끝나기만 하면 전화교환실 앞으로 달려가 쉬는 시간 내내 서성거렸다. 귀를 기울이고 슬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 이것저것 물었다.
기다리는 자에게 기회는 온다고 했던가. 한번은 전화교환원이 출근하지 않아 난리가 났다. 그때 선생님께 해보겠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리고는 기억을 더듬어 전화를 연결해 드렸다. 이후 외국에서 중요한 손님이 견학차 학교를 방문하면 나는 전화교환 업무를 멋지게 시연해 보였다. 교사들은 시각장애인도 할 수 일이 무궁무진하다며 교육의 기회를 많이 열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한 선생님께서 실무에 나를 투입시키자는 아이디어를 내셨다. 월급도 제대로 주겠다고 제안하셨다. 사실 초등학생을 고용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인데 그나마 옛날이라 가능했던 것 같고, 먹고살기 힘든 우리 집안 상황을 잘 알고 계신 선생님께서 특별히 신경 써 주신 것 같았다. 월급을 받아 학비도 내고 살림에도 보탰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