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김이석] 유로화의 재정 규율
입력 2012-06-24 18:54
전 세계가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유로존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남유럽 재정위기로 이어져 그리스에 이어 스페인마저 구제금융을 받는 처지가 되고 있다. 이에 따라 유로화의 장래를 어둡게 보는 의견이 많다. 우리나라는 혹시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하는 소위 그렉시트(Grexit=Greece+Exit)가 발생해 우리 금융시장에 급격한 대출 회수나 투자 회수와 같은 사태가 초래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예의주시하고 있다.
막대한 규모의 그리스 국채를 보유하고 있는 독일과 프랑스 은행들은 더 화급하다. 미국은 독일이 주도적으로 유럽기금을 마련해 현재의 유로존 사태를 해결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은 재정통합을 주장하며 그리스에 강력한 재정규율 방안이 확보되지 않는 한 그리스에 대한 추가적인 지원은 없을 것임을 공언하고 있다.
이런 공언을 하는 독일의 속내는 그리스에 대한 지원 규모를 줄여 자국민들의 부담을 최소화하려는 것일 뿐, 자국 은행들의 도산을 불러올지 모를 그렉시트 발생을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는 이를 간파하고 끊임없이 더 좋은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
폴 크루그먼 같은 일부 경제학자들은 그렉시트의 발생을 예견하고 있으며 그렉시트를 바람직한 것으로 보는 경제학자들도 적지 않다. 그리스의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확보하게 되면 자국 통화를 증발시킴으로써 평가절하를 단행하고 이를 통해 그리스 노동자의 실질임금을 낮추면 그리스의 가격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리스 정부가 중앙은행 차입을 통해 과감히 대규모 적자재정을 실행함으로써 유효수요를 창출하면 경기침체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목임금은 그대로 둔 채 화폐증발을 통해 실질임금을 하락시켜 노동자들로 하여금 명목임금을 실질임금으로 착각하게 해 경제회복을 도모하겠다는 것은 일종의 꼼수다. 임금과 물가의 연쇄적 상승으로 고물가, 고실업의 병존을 불러온다.
그렉시트의 발생은 이해관계자들의 반발로 쉽지 않다고 전망하는 한편, 이를 바람직하지 않게 보는 학자들도 있다. 스페인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데소토는 금본위제 복귀가 가장 바람직하다면서도 유로화가 가지는 재정규율적 측면에 주목한다. 동일한 통화를 쓰기 때문에 통화조작을 통한 실질임금의 변화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유로화체제는 복지국가의 재정적 지속불가능성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스페인에서 비록 불완전하지만 평상시 같았으면 낙관주의자들에게조차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이상론(理想論)으로 치부되고 말았을 정책들이 실행된 것은 바로 유로화체제가 지닌 강력한 재정규율적 요소 덕분이다.
스페인은 구제금융을 받는 과정에서 헌법에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재정규율 준수를 명문화했으며, 공공지출을 늘리는 각종 보조금 정책, 표를 사는 포퓰리즘 정책들을 정지시켰다. 이뿐만 아니라 공무원 봉급을 5% 삭감·동결했으며, 사회보장 연금을 실질적으로 동결하고 정년을 65세에서 67세로 연장했으며, 공공지출 규모를 15% 이상 삭감했다. 이와 함께 노동시장의 규제를 비롯한 여러 규제들을 대폭 완화했다.
이런 개혁은 스페인이 독자적인 화폐금융 정책을 실행하는 중앙은행을 가지고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스페인 정치가들이 표를 잃으면서까지 이런 정책을 추진했을 리 없다. 그들은 중앙은행 차입을 통해 더 큰 재정파탄을 초래할 정책들을 지속했을 것이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이 우리나라의 경제 체질을 바꾸는 계기가 됐듯 스페인도 그럴지 모른다. 우리에게도 유로화 같은 재정규율 장치가 있기는 한 것일까?
김이석 시장경제제도硏 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