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웅 목사의 시편] 피곤할 수 있는 특권

입력 2012-06-24 17:38


두 딸을 키울 때, 적잖게 힘든 일 중에 하나는 아이들을 업어주는 일이었다. 그 당시 집에는 자동차가 없었기 때문에 걷는 일이 많았고, 그 때마다 아이들을 업어주는 것은 내 차지였다. 때로 몸이 피곤해서 업어주는 것이 힘들고 귀찮을 때가 있었지만, 길바닥에서 떼를 쓰고 우는 것이 민망해서 설득을 포기하고 그냥 업어주곤 했다. 서로 업히겠다고 싸우는 큰 아이와 작은 아이를 번갈아가면서 업어야 했기 때문에, 외출 후 나는 녹초가 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첫째 아이와 단둘이 길을 가는데, 그 날은 업어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업어달라는 말을 하지 않으니 나는 편해서 좋았지만, 왠지 시원섭섭한 마음에 내가 먼저 업어주겠다고 제의를 했다. 그러나 첫째 딸의 반응은 전혀 의외였다. 싫다는 것이다. 왜 싫으냐고 물으니 창피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보면 다 큰 아이가 아빠에게 업혔다고 흉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오기가 생겨서 업어주겠다고 우겼고, 아이는 한사코 싫다는 것이었다. 어느새 상황은 예전과 역전이 되어버렸다. 나는 한번만 업혀 달라고 졸랐고, 아이는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업혀 주겠다고 튕겼다.

그때 내 마음속에는 표현하기 어려운 서운함과 묘한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아이를 업어주는 것이 마냥 힘든 일인 줄만 알았는데, 그래서 언제쯤 이 아이가 커서 업지 않고 걸어 다닐까 손꼽아 기다렸는데, 이제는 상황이 전혀 달라졌다. 오히려 내 마음속에는 ‘앞으로 내 딸을 다시는 업어볼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묘한 불안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슴 깊이 사무치게 깨달아지는 사실, 그것은 ‘힘들게 업어주던 일이 나에게 진실로 소중한 행복이요 기회요 특권이었구나!’ 하는 것이다.

장차 천국에 갔을 때, 우리는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우리가 이 땅에서 주를 위하여 피곤하며 고생했던 일들, 그것이야말로 오직 이 땅에서만 누릴 수 있는 기회요 행복이요 특권임을 알게 될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선교하시던 한 선교사님의 기도가 귀전에 생생하다. “주여! 우리가 주를 위해 좀 더 피곤할 수 있는 특권을 주옵소서” 그의 기도를 잊을 수가 없다. 그렇다. 피곤할 수 있는 것은 특권이다.

주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나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다. 이탈리아의 순교자 사보나롤라의 고백이 기억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추기경의 붉은 모자가 아니라, 오직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주신 바 순교의 피로 물든 붉은 모자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그는 순교의 붉은 모자가 면류관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피곤할 수 있는 것이 특권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나는 내 딸을 통해서 알았다. 그 덕분에 둘째 딸은 아빠에게 원 없이 업히는 특권을 누렸다.

<서울 내수동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