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신인식 (1) 앞을 못봐 불편?… 신학 공부에 세계 일주까지

입력 2012-06-24 17:42


사람들은 종종 내게 “앞을 볼 수 없으니 얼마나 불편하냐”고 묻는다. 그러나 나는 장애를 장애로 여기지 않기에 “지금의 나의 모습이 좋다”고 말한다.

만일 시각장애인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경남 의령군의 오지마을인 ‘달밭마을’에서 예수님도 알지 못한 채 농사를 지으며 살았을 것이다. 농부의 삶도 감사하지만 나는 장애로 인해 주님을 알게 된 후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에 지금의 삶이 더 감사하다.

신학을 공부했고 웬만한 악기는 모두 연주할 수 있으며, 세계일주와 국토순례도 했다. 무엇보다 전화로 인터넷을 검색할 수 있는 ‘종달새전화도서관’을 만들어 시각장애인들에게 알 권리를 충족시켜줄 수 있었기에 감사하다. 태어나 잠시나마 세상을 보고 또 즐길 수 있었던 것도 다행이고 다친 곳이 팔다리가 아니라 눈이라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마음껏 걷고 뛸 수 있으니 다행이고 사람들을 만나 악수를 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또 사랑하는 사람들을 안아 줄 수 있으니 다행이고, 그 모든 고난을 통해 오늘을 만들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아니고서야 이런 기적은 불가능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린도전서 15:10)는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말씀이다.

4살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술래잡기 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숨죽인 채 숨어 있는 것도 조마조마했고 꼭꼭 숨은 술래의 머리칼이나 옷자락을 찾아내는 것도 즐거웠고 정신없이 달려가는 것도 신났다. 그날따라 더욱 신이 나서 폭주 열차처럼 달려가다가 뭔가에 걸려 넘어졌다. 그날은 좀 많이 아팠던 것 같고 다친 곳은 이마였다.

시골에서 아이들이 뛰어놀다 넘어지고 다치는 건 매일 벌어지는 일이었다. 병원이 있는 도시까지는 아주 멀었으니 우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아갈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나을 거라 믿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이마를 다쳤던 난 시력이 계속 나빠지다가 급기야 전혀 볼 수없게 되어 버렸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될 거라고는 나도 식구들도 상상하지 못했다.

어둠에 익숙해져 갔지만 숱한 절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최악이라고 생각하면 그것보다 크고 거센 파도가 덮쳐왔다. 넘어뜨리고 무릎을 꿇리고 쓰러뜨렸다. 더 견딜 수 없다고 울고 있으면 더 큰 울음이 준비되어 있었다. 눈물을 너무 많이 흘리다 보니 언제부터인가는 눈물조차 말라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아이를 그냥 두지 않는 분이 계셨다.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지 않도록 몰아세우시는 분이 계셨다. 골방 바깥으로, 대문 바깥으로, 넓고 험난한 세상으로 내모는 분이 계셨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가난한 장애인으로 살아야 했기에 사실 긍정적이고 명랑한 성격을 갖기 힘들다. 그러나 환경에 굴하지 않고 명랑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지금의 내 성격은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진 성격이다. 수준급 코미디언이라고 할 정도로 사람들을 잘 웃긴다.

예를 들면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를 짚고 버스에서 내릴 때 큰소리로 외친다. “여러분!” 사람들이 금 세 집중한다. 뭔가 팔려고 그러는가 보다 한다. 그러면 “여러분! 저 요번에 내립니다”라고 말한 후 아카데미 시상식장의 레드 카펫을 밟는 영화배우처럼 우아하게 버스 계단을 내려온다. 버스는 웃음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들썩거린다. 따뜻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손을 흔들고 파이팅을 해 준다. 물론 불쌍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미친 거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 귀는 좋은 말만 듣는다.

△약력=1957년 경남 의령 출생, 서울장로회신학대학교 졸업, 미국 페이스신학교 박사과정 수료, 대구대학 이학박사, 현 종달새전화도서관 관장, 한국시각장애인기독교연합회 회장, 대구대학 겸임교수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