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여, 선배들의 ‘영향’에 맞서 투쟁하라”… 해럴드 블룸 ‘영향에 대한 불안’
입력 2012-06-22 18:32
20세기 최고의 문학비평가 중 한 사람인 미국 예일대 석좌교수 해럴드 블룸(82)의 대표적 비평서 ‘영향에 대한 불안’(문학과지성사)은 현대의 문학이론서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저술로 꼽힌다. “후배 시인이 선배 시인의 ‘영향’에 대한 ‘불안’을 통해 새로운 시를 창조한다”라는 비평서의 논지는 블룸 이전에도 없었고 블룸 이후에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블룸 이전의 문학이론은 “후배 작가가 선배 작가를 모방하는 문학 전통의 연속성을 당연한 것”으로 가정해왔다면, 블룸 이론의 특징은 문학 전통의 연속성과 유사성이 아닌 ‘왜곡’과 ‘차이’ ‘오역’에 주목했다는 데 있다. 블룸에게 중요한 것은 문학 전통의 연속성이 아니라 불연속성, 즉 선배 작가의 모방이 아니라 선배 작가의 모방을 넘어서 능가하는 것이며, 그는 이것을 ‘시적 오류’라는 창조적 해석을 두고 펼쳐지는 갈등과 투쟁의 미학이라고 지칭한다. 다시 말해 후배 시인들은 위대한 선배 시인의 ‘영향’이라는 방해자와의 투쟁을 통해서만 스스로 독창적인 시인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입센은 아마도 다른 누구보다도 더, 괴테보다도 훨씬 더 ‘영향’을 혐오했는데, 이는 특히 그의 진정한 선구자가 셰익스피어였기 때문일 것이다. 셰익스피어에게 오염되는 것에 대한 이런 두려움은 다행히도 이 노르웨이 극작가가 셰익스피어를 피하기 위해 발견했던 다양한 방식 속에서 가장 입센다운 방식으로 표현되었다.”(28쪽)
사실 블룸은 입센과 같은 강한 시인(문인)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강한 시인들이야말로 선구자들을 극복해 낼 수 있는 에너지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블룸은 ‘영향에 대한 불안’이 시적 창작으로 발현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은 여섯 개의 수정률로 제시한다.
첫 번째 수정률은 ‘클리나맨’으로, 선배의 시에서 이탈해 오독하는 과정의 시작이다. 이는 창조의 과정에 동반되는 선배 시로부터의 이탈, 타락, 오독을 의미하며 수사학적으로 아이러니에 해당한다. 한국 문학을 예로 들자면 시인 기형도가 선배 시인 이성복을 오독하거나 이성복 시의 이미지를 빌려온 경우에 해당한다.
두 번째 수정률인 ‘테세라’는 원래 고대 신비 숭배에서 인식의 표지로 활용하던 도자기의 파편을 의미한다. 도자기의 파편들이 맞추어져 전체가 되듯이 새로운 시가 선배 시를 대조적으로 완성시킨다는 것이다. 블룸 전문가인 정과리 연세대 국문과 교수는 “이 이론을 한국 현대시에 적용하자면 청마 유치환과 김수영 시인의 관계를 상정할 수 있을 것”이라며 “예컨대 선비적인 기개라는 측면에서 청마가 한국 남성시의 주춧돌을 놓았다면 김수영은 청마의 영향에서 벗어나 현대적이고 혁신적인 남성시를 쓴 경우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세 번째 수정률은 ‘비우기’라는 뜻의 ‘케노시스’이다. 선배 시를 극복하기 위해 앞선 언어의 충만함을 비운다는 것이다. 이 경우는 황지우와 황인숙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정 교수는 “지협적이긴 하지만 황지우의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게로’라는 시는 혹독한 환경을 극복하려는 겨울나무의 완벽한 긴장을 다루고 있지만 후배 시인 황인숙은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다른 지점에 대해 들려준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황인숙은 “꽃들은 긴장 때문에 시들어요/ 싱싱한 장미꽃은/ 얼마나 관자놀이가 욱신거릴까요?”(‘처녀처럼’)라고 노래하며 황지우를 비워내면서 새로운 시를 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네 번째 수정률은 악마화이다. 여기서 악마는 선악의 기준으로 악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악마화는 특히 선배 시인의 시에 나타난 숭고에 맞서는 반-숭고의 미를 자신의 시에서 드러내는 상상력의 분출을 의미한다. 비유적으로 악마화는 과장법에 해당하는데, 이는 선구자의 숭고에 맞서기 위한 반-숭고를 표현하려면 더 많은 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수정률은 ‘아스케시스’로, 블룸은 이 말을 “고독의 상태에 도달하려고 의도하는 자기정화 움직임”이라고 정의한다. 강한 시인은 악마적으로 고양되기 마련인데, 선배 시인들에 대한 공격 본능이 자신에게 향하게 됨으로써 자기 정죄적(定罪的)이 돼 고독의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수정률은 ‘아포프라데스’이다. ‘아스케시스’가 자기정죄적인 고독의 상태에 침잠하는 것이라면 ‘아포프라데스’에서 젊은 시인은 다시 선배 시인에게로 자신을 개방하고, 죽은 선배 시인은 다시 귀환한다. 이 마지막 수정률에서 블룸의 수정률은 순환을 마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지만, 이 순환은 원점으로서의 회귀가 아니며 젊은 시인은 죽은 시인의 영향의 홍수에 매몰되지 않는다. 오히려 선배 시인과 후배 시인과의 역전 현상이 일어나는 지점인 것이다. 후배 시인은 선배 시인이 오히려 “자신의 작품에 빚진 것이고 심지어는 자신의 더 큰 영광에 의해 (필연적으로) 왜소해지도록 선구자를 자기 자신의 작품 속에 배치해 승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한국 현대시의 시적 모험 기간은 겨우 백년 남짓이라는 점에서 블룸의 이론을 그대로 적용할 만한 표제적 시인들이 그리 많지 않다”며 “우리 문학은 선배 시인들을 거꾸로 견인하는, 여섯 번째에 해당하는 위대한 시인을 기다리는 형국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