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20) 지구별에 불시착한 우주 소년… 시인 김산
입력 2012-06-22 18:32
개인사를 우주사에 끼워넣는 독창성
날고 싶었던 소년의 꿈, 언어로 실현
소년은 충남 논산시 연무대읍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부모님은 재래시장에서 닭집을 하며 가계를 꾸렸다. 열 살 때인 1985년 가을. 닭집은 남의 손에 넘어갔고 부모님은 서울로 야반도주를 했다. 조부모와 함께 살던 소년은 방학 때 서울 하월곡동 달동네에 사는 부모님과 잠시 함께 지냈다. 고속터미널에서 헤어질 때 소년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곤 했다. 왜 식구끼리 떨어져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차츰 말수가 줄었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항상 1등을 했지만 담임은 반장을 시켜 주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장래 희망란에 ‘나는 것’이라고 썼다. 담임선생님은 친절하게 ‘비행기 조종사’로 정정해줬다. 소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의 희망은 조종사가 아니라 ‘나는 것’ 그 자체였다. 부모와 떨어진 후 그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해 집 앞 텃밭의 꽃이나 나무에게 말을 걸며 외로움을 달랬다. 그는 날고 싶었으나 그것은 비행기 조종사 같은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다분히 관념적인 심상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그를 전학시키려고 내려왔을 때 국어선생님은 이렇게 말해주었다. “너는 시인이 되면 잘 어울릴 것 같구나.” 하지만 이 말을 오래도록 잊고 살았다. 가정형편 때문에 서울 대방동의 한 공고에 진학한 그는 군대에 가서 선임이나 장교들의 연애편지를 대필해 주면서 문학에 눈뜨기 시작했다. 대학에서의 전공은 일본어였으나 그는 전공은 제쳐놓은 채 10년 동안 습작시를 끼적였다. 그리고 2007년 계간 ‘시인세계’ 신인작품 공모에 ‘날아라 손오공’으로 당선의 기쁨을 안았다. 김산(36) 시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엘프족을 닮은 여자가 있다/ 이름 모를 행성과 충돌하고/ 흩어진 가계를 수습하기 위해/ 가위 하나만 달랑 손에 쥐고/ 지구별로 야반도주한 여자/ 건조한 내 머리에 물을 뿌리며/ 숙련된 손길로 싹둑싹둑/ 한 달간의 근심을 가지 치는 여자/ 웃자란 생각들을 좌우로 보며/ 마침맞게 중심을 잡아주는 여자/ 이따금 새순으로 피어난 꽃말들이/ 그믐처럼 그윽하게 입가에 스미는 여자/ 언젠가 여자는 나를 쓸어담고/ 그녀가 왔던 행성으로 되돌아갈 것이다”(‘은하 미용실’ 부분)
첫 시집 ‘키키’(민음사·2011)는 지구별에 떨어진 외계인이 지구인들을 관찰하고 느낀 바를 적은 감성적 보고서다. 시의 화자는 소행성에서 온 외계인이다. 지구 어머니의 몸을 빌려 태어난 그가 지구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글로 기록하고, 그것을 자신의 고향인 소행성에 돌아가 얘기한다는 설정이다. 소년 시절부터 날고 싶었던 꿈은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의 입장으로 변주되지만 개인사를 우주사 속에 끼워 넣는 방식에서 독창성이 느껴진다.
하지만 첫 시집을 내기 전인 2009년 2월의 마지막 날 새벽, 그는 인천 간석동에 있는 집으로 귀가하던 중 오른쪽 어깨와 다리뼈가 모두 으스러지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찰나에 시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죽는구나’가 아니라 ‘시집 한 권도 못 냈는데…’였다. 대수술을 두 번 거쳤다. 다행히 머리와 손은 멀쩡했다. 시를 쓰고 싶어 물리치료와 재활운동에 매달리는 동안 그의 시의 진가를, 그러니까 김산 시의 ‘재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생과 사의 기로에서 다시 지구로 돌아온 그는 한층 더 강화된 재기와 발랄함, 선명한 시적 감각으로 무장했다. 그는 요즘 언어의 음성학적 리듬이 살아 있는 새로운 종(種)의 시편들을 선보이고 있다.
“사흘째 비가 온다. 하루는 비의 창살만 보았고 하루는 기타를 메고 한강을 건넜고 하루는 비의 옆에 누워 비감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나는 키스에 대해 생각한다. 창밖 가스 배관을 타고 오르는 도둑고양이 한 쌍이 키스 키스 키스하며 쏜살같이 달아난다. 빗물이 누군가의 타액처럼 창문에 자국을 남긴다. 그리고 나는 다시 잠실에서 신도림까지 비를 맞으며 걸었던 기억을 기억한다.”(‘Kiss The Rain’ 부분)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