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영 장로 칼럼] 종교인과 신앙인 (7)
입력 2012-06-22 16:03
신학 속에 하나님이 없다면
나는 오래 전 의약품을 팔기 위해 인도에 출장을 가서 현지 거래선과 상담하면서 인도의 종교를 접하게 되었다. 인도의 모든 음식에는 절에서 나는 향냄새가 배어있었다. 그리고 거리엔 소떼가 주인도 없이 돌아다닌다. 자동차가 아무리 빵빵거려도 소는 움직일 줄을 모른다.
거리에는 먹지 못해 누워 있는 거지들이 즐비하지만 소가 신이라 경배의 대상이 되어 잡아먹지 못한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같은 소라도 암소이어야 신이지 수소는 신이 아니라 짐도 나르고 일도 시킨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신의 아내인 헤라가 소로 변해서 여신으로 추앙받는다고 하는데 이러한 인도의 소 숭배사상과 어떤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이집트에서도 황소는 세트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 땅의 모든 동식물들은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명령과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도리어 그것들을 신의 반열에 올려놓고 받들어 모시는 말도 안 되는 행위를 하고 있다.
크리스천이라면 레위지파처럼 분연히 일어나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해야 한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가지고 내려올 때 유대민족이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신이라고 숭배하다가 모세의 노여움을 샀다. 이때 참석한 사람들 모두를 레위 지파가 칼로 죽인 사건이 있다. 그래서 레위 지파는 제사장 지파로 인정받은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천사의 삼분의 일을 이끌고 하나님을 배신한 루시퍼는 인본주의의 시조이다. 스스로 하나님과 견주고 하나님만큼 높아지려는 생각이 바벨탑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 생각이 현대 철학에서의 실존주의 철학과 자유신학으로 파급되어 지금 하나님 없는 신학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고백이 없는 신학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야경의 절반이 십자가일 정도로 교회들이 많은 우리나라지만 신앙의 질은 어디에 있는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예수님은 먼 나라 사람일 뿐이다. 교회는 이성과 과학이 지배하는 인간들의 생각만으로 가득하고 정작 교회의 주인인 예수님은 교회 문 밖에 계신다. 지금은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세대인 것 같다.
요한계시록 3장 16절에 보며“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미지근한 신앙을 질타하신다. 우리의 입맛에 맞춘 신앙이 아닌 확실한 신앙을 우리 아이들에게 심어주어야 할 때다.
나는 ‘예수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판단하실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언제나 예수님이 생활의 중심인 삶을 살고 싶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이 교회의 반석이다. 이 고백을 삶 속에서 잊지 않고 적용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강덕영 장로/ 한국유나이트문화재단 이사장, 갈렙바이블아카데미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