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사실과 위엄 사이 한·중·일 군주 초상화… ‘왕의 얼굴’
입력 2012-06-21 18:35
왕의 얼굴/조선미/사회평론
정보통신시대엔 대통령의 얼굴이 매스 미디어를 통해 하루에도 수십 차례에 걸쳐 일반에 공개된다. 하지만 옛 왕들의 얼굴은 구중궁궐 속 신비주의의 대상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잠깐이나마 왕의 얼굴을 볼 기회가 있었다면 관상학을 빌려서라도 왕의 성품을 예측해 보려고 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통치자들이 이런 백성들의 마음을 거꾸로 이용했다는 점이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황제가 되고 나서 자신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를 전국에 배포한다. 그 초상화는 커다란 턱에 튀어나온 광대, 굵직한 코에 지나치게 돌출된 이마, 여기 저기 얽은 흔적이 있는 곰보 상이었다. 이렇듯 흉측한 모습으로 황제의 얼굴을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은 유명한 다섯 산과 방위를 묶어 중악, 동악, 서악, 남악, 북악이라 불렀는데, 사람 얼굴에 있는 코, 오른쪽과 왼쪽 광대, 이마와 턱 등 다섯 부분도 오악이라 불렀다. 그리고 사람 얼굴에서도 이 오악이 산처럼 높고 클수록 대길하다고 보았다. 주원장은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듯하다. 얼굴에서 오악 부분을 최대한 크게 그린 초상화를 배포해 백성들에게 자신이 황제가 될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선전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한·중·일 삼국에서 군주의 초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씩 달랐다. 중국 황제들의 초상은 주원장 초상에서 보듯 중요한 선전 수단이었다면 일본에서는 다른 측면으로 천황의 초상 작업이 전개된다. 일본에서 천황은 쇼군(장군)이 중심인 막부와 대립을 지속해야 했으므로 개인적으로도, 위정자로서도 행복하지 못했다. 복잡한 정쟁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불운했던 군주를 그리는 일본의 초상에는 그래서 애도와 추모의 느낌이 강하다. 일본 가마쿠라시대의 하나조노(1297∼1348) 천황의 젊은 시절 초상화를 보면 ‘니세에’라는 일본 초상화 고유의 기법으로, 대상의 특징을 몇 가지 선으로 잡아내 강조하면서 화려함보다는 인간적인 면모를 강하게 드러낸다.
조선시대의 군주 초상화는 중국 일본과는 또 다른 특징이 발견되는데 바로 극단적인 사실감이다. 어진의 특징으로 ‘털끝 하나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一毫不以 便是他人)’라는 정확성에 대한 집요한 추구가 있었다. 피부의 주름 하나, 반점 하나 놓치지 않는 정확한 묘사가 어진에서도 구현됐던 것이다. 묘사하려는 대상과의 차이를 최대한 줄이려는 이런 노력의 이면에는 그림과 사람이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왕의 초상은 왕 그 자체였으며, 왕권과 정통성을 상징하는 강력한 조형물이었다.
왕자의 난을 거치며 용상에 앉은 태종은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태조 어진 봉안과 진전 건립에 적극적이었고, 왜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광해군, 열강의 침탈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고종 등도 모두 어진 제작과 봉안, 진전 건립에 열성적이었다. 이런 이유로 조선시대의 어진은 조금이라도 훼손되면 다시 그리기를 반복했다. 영조는 재위기간이 길었던 만큼 어진도 많이 제작됐다. 하지만 아직 왕자 시절의 영조를 그린 ‘연잉군 초상’을 제외하고 남아 있는 것은 51세 때 영조 모습을 그린 반신상을 1900년에 새로 그린 작품이 유일하다. 저자는 성균관대 미술학과 교수.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