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26)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입력 2012-06-21 18:08


마가, ‘음란하고 죄많은 세대…’ 장차 올 일에 대한 예수님 말씀 주목

베드로가 불러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가르침을 받아 적으면서 마가는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특히 마가 자신의 집과 관련된 유월절의 식사 장면과 그 자신도 따라갔던 겟세마네의 현장은 비록 그 때로부터 20 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그의 기억에 선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본 것은 장차 올 일에 관하여 그분이 말씀한 대목이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그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막 8:31-32)

베드로가 그분을 붙들고 항변했다가 오히려 꾸중을 들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 8:33)

그것은 가사사랴 빌립보 인근의 바네아스 계곡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예수께서는 다시 계곡에서 나와 제자들 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든 ‘무리’에게 장래의 일에 관해 언급하셨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8)

그분의 충격적인 말씀이 더 이어졌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막 9:1)

당시 이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죽기 전에 종말과 심판의 날이 임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들이 다 죽은 후에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일 수 밖에 없다. 이 말씀이 뒤이어 나오는 변화산의 영광을 가리킨 것이라는 해석도 있고, 그리스도의 부활 또는 성령 강림을 가리킨다거나 예루살렘의 멸망을 의미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것은 모두 ‘죽기 전에’라는 표현과 모순되지 않는다. 이는 모두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곧 교회 시대가 도래하며, 이방 가운데 교회가 확장되며, 사람들이 수천 명씩 회심하며, 많은 권능의 은사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이 지금 그의 말씀을 듣고 있는 무리 중 몇몇 사람들의 생전에도 일어나기 시작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최세창 ‘마가복음’)

과연 그 말씀을 하신지 엿새 후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헬몬 산으로 추정되는 그 산에서 예수께서는 빛나는 모습으로 변형되어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셨고, 세 명의 제자들은 전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들으셨던 음성을 직접 들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막 9:7)

그 산에서 내려왔을 때 한 사람이 그의 귀신들인 아들을 데리고 왔다.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며 파리해지는 그를 고쳐 달라는 것이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막 9:19)

예수께서는 귀신을 꾸짖어 내쫓고 아이를 잡아 일으키셨다. 그리고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신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로 말씀하셨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또 세 번째로 같은 예고를 하셨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막 10:33-34)

베다니에 이르러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후 그분의 말씀은 성전 안에서 계속되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실 때 한 제자가 물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막 13:1)

신학자 헨드릭슨(W. Hendriksen)은 그렇게 질문한 제자가 성급한 베드로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예수께서 그의 질문에 대답하셨다.

“네가 이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 13:2)

성 밖으로 나가신 예수께서 감람산에 올라 그 성전을 내려다보고 계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물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막 13:4)

제자들은 부지중에 두 가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즉 ‘이런 일’은 성전이 파괴되는 사건에 대한 것이었고, ‘이 모든 일’은 종말과 심판에 관한 의미였던 것이다. 제자들의 질문은 자신들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이었으나 그 질문에 답하시는 예수의 말씀에도 역시 복합된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 기록된 예언들이 보편적으로 지닌 다중성이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막 13:14)

그것은 BC 538 년 기록된 다니엘의 예언을 인용한 것이었다.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단 9:27)

그 예언대로 BC 186 년 수리아 왕 안티오쿠스 Ⅳ세는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유대인들에게 모진 박해를 가했다. 그러나 다니엘의 예언이 적용될 수 있는 사건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스룹바벨이 재건한 성전을 철거하고 BC 20 년 새 성전의 건축을 시작한 헤롯 왕은 성전의 정문에 거대한 황금 독수리 상을 세워 백성들의 공분을 샀다. BC 4 년 헤롯 왕이 병들자 예루살렘 청년들은 성전으로 달려가 그 독수리 상을 파괴했고, 왕은 그 주동자들을 잡아 화형에 처했다. 그리고 그 사건은 후일 헤롯의 후계자 아켈라오 때에 성전의 폭동으로 이어져 3천 명이 학살당하는 참사로 이어졌던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의 신탁이 한 가지 이상의 역사적 상황에 적용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암시이다.”(최세창 ‘마가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도 그와 같은 사건은 이어졌다. AD 39 년 칼리굴라는 예루살렘 성전에 황제의 신상을 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 AD 70 년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에도 로마 군대는 독수리가 그려진 휘장을 들고 성전에 난입했고, 병사들은 돌 사이에 들어 있다는 황금을 찾기 위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부수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한 예언에도 ‘예루살렘의 멸망’과 ‘역사적 종말’에 관한 것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막 13:30)

그러므로 당시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세대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고 생각했으나 마가는 베드로가 구술을 받아 쓰면서 이 ‘세대(게네아)’에 대한 것도 유대인의 세대, 제자들의 세대, 그리스도인의 세대, 전 인류의 세대 등 다중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그 ‘세대’라는 어휘를 ‘음란하고 죄많은 세대(막 8:38)’ 또는 ‘믿음이 없는 세대(막 9:19)’ 등 상징적 의미로 사용하셨다. 그러나 마가가 특히 주목한 것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당장 닥쳐올 수 있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것이었다.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해서는 이미 BC 700 년경 선지자 이사야가 역시 다중적 의미의 예언을 했다.

“내가 너를 사면으로 둘러 진을 치며 너를 에워 대를 쌓아 너를 치리니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말소리가 나직이 티끌에서 날 것이라”(사 29:3-4)

그 후로 예루살렘은 BC 605 년, 597 년, 586 년 세 차례에 걸친 바벨론의 침공으로 멸망했고, BC 539 년 이후 페르샤의 지배를 받았고, 다시 BC 322 년 알렉산더의 헬라군의 손에 들어갔다. BC 186 년에는 안티오쿠스 Ⅳ세의 박해를 당했으며, 레위 지파의 하스몬 가문이 잠시 독립 왕조를 세웠으나 다시 로마의 속주가 되어 BC 37 년부터는 이두매 출신 헤롯 가문의 왕이 통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다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신 것이다.

김성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