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왕과 사대부, 500년을 이어준 ‘권력의 끈’

입력 2012-06-21 18:32


국왕의 선물(전2권)/심경호/책문

조선 왕조를 이끈 27명의 국왕들은 사대부나 외국 사신들에게 증여한 유형무형의 선물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사대부에게 일정한 권력을 위임하는 방식으로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그런데 조선시대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국왕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이들은 신료, 공신, 종실, 부마, 지방관을 비롯한 사대부와 왕실 등 고위층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역대 국왕들은 군인, 백성, 귀화인, 외국사절, 자신을 길러준 유모, 궁궐 시녀에 이르기까지 필요에 따라 다양한 인물들에게 선물을 증여했다.

“국왕이 선물을 내리는 것을 한자로 내사(內賜)나 하사(下賜) 혹은 은급(恩給)이라 했다. 이때에는 하사품 외에 선물의 발급주체와 발급관청이 명시된 은사문도 함께 내렸다.”(7쪽)

선조는 재위 37년인 1604년에 이순신, 권율, 원균, 김시민, 이정암 등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선무공신’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예종은 1468년 유자광이 남이를 모함해 일어난 ‘남이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운 37명에게 익대공신의 칭호를 내리고, 엄청난 물품과 함께 궁중의 술을 내려 주었다. 이는 포상의 성격이다. 하지만 국왕의 선물과 관련된 슬픈 역사의 기록도 있다. 조선 조정은 역적의 집과 가솔들을 몰수해 공신들에게 배분했는데, 여성들도 그 배분의 대상이었다.

단종은 계유정난의 공신들에게 세조의 반대편에 섰던 역적과 그 연좌인들의 집을 몰수해 하사했는데 즉위년인 1452년 4월 27일에는 명신(名臣) 김종서의 집을 시녀 내은이(內隱伊)에게 내려주었다. 또한 역적죄로 몰려 공신들의 여종이 된 이들을 공신비(功臣婢) 혹은 공신비첩(功臣婢妾)이라고 했는데, 윤근수의 ‘월정만필’(1595년)을 보면 단종의 왕비 송씨가 관비가 됐을 때 그녀를 공신비로 삼아서 받으려 한 공신도 있었다.

이처럼 국왕의 선물은 감정이 담긴 일종의 통치수단이었다.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내리는 경우도 있었다. 태조는 함경도 동북면에 산재한 조상들의 무덤들을 보살피고 동시에 그 지역 행정조직을 정비하기 위해 도선무순찰사 정도전에게 동옷을 내렸다. 세종은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강역을 확정하기 위해 김종서를 보내면서 자신이 입고 있던 홍단의를 주었다. 문종은 부왕의 뜻을 이어 함길도를 안정시키기 위해 상중에 있던 이징옥에게 의복을 내려주었다.

온천욕을 하사한 경우도 있었다. 세종이 강원도 이천의 온천에 행차했을 때 도승지 이승손 등 시종신에게도 온천욕을 하사했다. 세조는 신숙주에게 소주 다섯 병을 부치고 정인지 등 조정 신하들에게 새봄을 맞이하는 시를 지어 집안 기둥에 붙이는 춘번자삽모(春幡子揷帽)를 하사해 혁명 이후 군신 관계를 새로 맺어나갔다.

성종은 자신의 장인 한명회에게 압구정시(狎鷗亭詩)를 내렸고, 선왕 이래 서적의 편찬과 문화 창달에 공을 많이 세운 달성군 서거정에게 호피를 하사했으며, 외직에 잠시 나가 있었던 영안도 관찰사 허종에게 한약재인 보명단(保命丹)을 내렸다. 이밖에도 중종이 홍문관 수찬 조광조에게 털요 한 채를 내린 일, 명종이 조식에게 약재를 내리면서 상경을 종용한 일, 선조가 원접사로 나가는 이이에게 호피를 내리고, 향촌에 칩거하고 있는 유성룡에게 백금을 내린 일, 광해군이 자신의 등극에 큰 힘이 됐던 좌의정 정인홍에게 표석을 내린 일, 인조가 이경석에게 황감 열 개를 내린 일, 효종이 세자 시절의 사부 윤선도에게 성균 사예의 벼슬을 주고 역마를 타고 올라오게 한 일 등은 선물을 활용한 국왕의 섬세한 통치력을 보여주는 예이다.

이렇듯 조선 500년 동안 국왕과 신하의 관계는 실로 어수(漁水)의 관계였다. 국왕은 때로 신하에게 주연을 베풀기도 했다. 명종이 재위 15년(1560년) 9월 19일에 창덕궁 후원인 서총대에서 베푼 곡연(曲宴)은 대표적인 예이다. “이날 명종은 율시로 지은 어제(御題)를 내리고 좌우에게 명하여 하운시를 지어 올리게 하고, 또 무신에게 명하여 과녁을 쏘게 하여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1권 408쪽) 이 곡연을 그린 게 고려대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명묘조서총대시예도’이다. 연회 참석자들의 명단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상진(尙震)의 문집 ‘범허정집’에 적혀 있다.

조선시대엔 국왕이 신하에게 서적을 하사하는 것도 관례였다. 여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었다. 예컨대 성종이 문신들에게 ‘자치통감’과 ‘통감목’ ‘자치통감 속편’을 하사한 것은 문신들이 통감학을 공부해 조선 역사를 새로 서술하는 역사관을 양성하길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효종이 송시열에게 ‘주자어류’를 하사한 것은 어째서인가? 그것은 주자학을 정학(正學)으로 삼는다는 확고한 뜻을 표방하고 송시열에게 ‘주자어류’를 기반으로 주자학의 본질을 탐색하여 그 이념을 정치에 실행하라는 뜻을 전달한 것이다.”(2권 163쪽)

국왕은 지방 민간의 삶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가져 질병을 퇴치하고 재해를 막거나 지역공동체를 결속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였는데 그 경우에도 선물을 자주 활용했다. 문종은 전염병이 창궐하는 황해도에 벽사약을 내렸고, 예종은 호랑이를 쏘아 바친 적성현 정병에게 동옷 한 벌을 내렸다. 현종은 유랑민을 잘 구호한 광주목사 오두인에게 말을 내려 주었으며, 숙종은 황해도 연안의 이정암 사우에 은액을 하사했다.

조선의 국왕은 외교적으로 국가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 갖가지로 노력했다. 세종은 명나라에 대해 국격에 맞는 사절을 보내라는 무언의 압력으로 ‘황화집’을 간행해 명나라 사신에게 증정했다. 성종은 유구 사신을 칭하는 하카다 출신 일본인에게 조선의 토산품을 내려서 일본, 대마도, 유구와의 외교적 관계를 신중하게 이어나갔다. 광해군은 명나라 요구로 후금과 전투하러 나가는 강홍립의 군사에게 몸을 덥힐 목면을 하사했다.

대한제국의 고종은 최익현에게 돈 3만 냥을 선물하고, 양무위원 이기에 대한 징계를 사면하는 한편 일제 압력으로 퇴위해 상왕이 돼 있을 때는 유길준에게 용양봉저정을 하사하면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하지만 국권을 강제로 빼앗긴 순종은 의병들을 토적으로 규정하고 일본 거주민들을 위문하고 일본군 주차사령부에 1000원을 하사하기도 했다. 이때에 이르러 조선 국왕은 국왕의 권력과 국가의 주권을 외세에게 넘겨주었다. 국왕의 선물은 관직과 마찬가지로 사회와 개인에 영향을 미치는 공기(公器)였다. 이 공기를 조선말에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함으로써 조선 500년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