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오경아] 밤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입력 2012-06-19 18:28


6월 들어 마음이 편치 않은 날들이 많다. 머리 한구석이 송곳에 찔리는 것처럼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잊으려고 해도 쿡쿡 찌르며 신경을 날카롭게 만든다. 마음이 심란해 잡은 책이 영국의 유명 정원사인 캐서린 스위프가 쓴 ‘모빌에서의 나날’이었다. 책은 그녀의 정원인 모빌에서 생긴 이야기를 달별로 식물에 대한 상식을 곁들여 잘 담고 있었다. 첫장부터 읽지 않고 6월의 이야기를 먼저 펼쳤는데, 첫 문장이 ‘Just looking!’이다.

정원사라고 하면 정원 속에서 얼마나 정서적인 위로를 받으며 살까 싶지만 정작 정원이 일터가 되면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분주히 일을 하다보면 정작 정원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를 놓칠 때가 많다. 그녀가 말하고 싶은 건 잠시 들고 있던 삽을 내려놓고 ‘단지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6월을 기점으로 정원은 이제 봄을 내려놓고 여름으로 접어든다. 봄이 파릇하고 생동감이 가득한 연초록이었다면 여름의 초록은 두터워지고 짙어지고 누렇게 빛이 바래기 시작한다. 특히 우리나라 자생종은 수천, 수만년의 경험을 유전자에 담고 있어 6월의 끝자락에 장마가 올 것이고, 7∼8월이 되면 무더위와 병충해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병충해가 뚫고 오지 못하도록 잎을 두텁고 뻣뻣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조치에도 치열한 삶의 현장 속에 있는 식물들은 벌레에게 뜯기며, 또 혹독한 여름 날씨를 견디며 만신창이가 된다. 그러니 가을, 열매를 가득 맺고 있는 식물들을 보면 열매는 탐스러우나 그 잎은 벌레 먹고 병들어 차마 보기 맘 아플 정도가 된다.

이 치열한 삶의 시간이 오기 전, 6월은 식물들의 부드러운 초록을 즐길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다. 정원사 캐서린이 말하고 싶은 ‘6월, 단지 바라봐라’의 의미는 바로 이 마지막 식물의 건강함을 즐기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 사무실 창문 앞에는 밤나무 한 그루가 있다. 아침이면 창문의 블라인드를 올리는 일로 일과를 시작했는데 늘 보면서도 밤나무에 밤꽃이 벌써 일주일 전부터 피어있다는 걸, 열어놓은 창문으로 진한 밤꽃 향기가 내 책상을 돌아 나가는 걸 모르고 지냈다.

모니터 화면에 고정돼 있는 눈을 떼어내 창문 밖의 밤나무를 한동안 바라본다. 밤나무는 참으로 오랜 세월을 우리 곁에서 살아왔다. 밤나무는 한 나무 안에 암꽃과 수꽃이 같이 피어난다. 수꽃은 연노란색으로 강아지풀처럼 길쭉하게 매달려 얼핏 보면 꽃으로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또 수꽃의 무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운데 아래쪽으로 작은 암꽃이 피어있는데 이 역시도 색깔이 연초록이어서 지나치기 쉽다.

카메라를 들고 밤꽃을 찍겠다고 사무실 밖으로 나간다. 초를 다투며 산다고 초 단위로 잘 살게 되는 것도 아닌데, 코앞에 피어있는 밤꽃 피는 걸 쳐다볼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지내온 게 안타까워진다. 그저 바라보자! 밤꽃이 이 6월의 끝자락에 피어났음을! 그리고 가끔은 모든 걸 멈추고 나 자신도 이렇게 들여다봐야 하는 시간도 분명 필요하다.

오경아(가든 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