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배병우] 미국의 돈선거

입력 2012-06-19 18:36


2002년 3월 27일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의회를 통과한 ‘초당파선거운동개혁법(BCRA)’에 서명했다. 제안자인 존 매케인(애리조나·공화), 러스 파인골드(위스콘신·민주) 상원의원의 이름을 따 ‘매케인-파인골드법’으로 불리는 이 법은 미 정치자금 개혁 역사에서 큰 획을 긋는 성취였다. 이 법에 따라 오랫동안 정·경 유착의 주범으로 지목받아온 기업이나 이익단체가 정당에 제공하는 후원금인 ‘소프트 머니’가 금지됐다. 대신 일반 시민이 개별 정치인에게 기부할 수 있는 2300달러 이하만 정치자금으로 인정됐다.

하지만 이 획기적 성과는 2010년 1월 21일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물거품이 됐다. 대법원은 기업이나 이익단체들이 특정후보를 편들거나 떨어뜨리기 위한 선거광고에 돈을 쓰지 못하도록 1947년 제정된 법조항이 “헌법에 규정된 언론 자유에 위배된다”며 5대 4로 위헌 판결했다.

이 판결에 기초해 두 달 뒤 워싱턴DC 항소법원이 내린 판결은 미 정치자금 개혁운동에 대한 최종 사망선고였다. 앞으로 민간 정치자금단체인 팩(정치행동위원회·PAC)들은 기부 받은 돈을 특정후보나 정당에 직접 내지 않는 한 개인이나 회사, 이익단체로부터 무제한의 정치자금을 받을 수 있다는 요지였다. 후보나 정당과 ‘독립적으로’ 운영되기만 한다면 개인, 기업으로부터 무제한의 돈을 모금, TV광고를 제작하는 등 직접 선거에 개입하는 ‘슈퍼 팩’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두 판결이 남긴 파장은 시간이 갈수록 확연해지고 있다. 요즘 미국 정가에서 최대 화제의 인물인 라스베이거스 샌즈그룹의 셸든 아델슨 회장의 예를 보자. 재산이 250억 달러(2조9250억원)에 이르는 이 카지노 황제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낙선시키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하겠다고 공언한 뒤 밋 롬니 공화당 대선후보 지지 슈퍼 팩에 1000만 달러 등 천문학적인 금액을 기부하고 있다. 슈퍼 팩들은 이를 재원으로 엄청난 물량의 오바마 반대 선거광고를 제작, 경합주에 퍼붓고 있다.

18일 허핑턴포스트에 따르면 아델슨은 올 들어 3600만 달러를 공화당 인사들에게 쏟아 부은 데 이어 추가로 3500만 달러를 공화당의 대표적 책사인 칼 로브가 운영하는 정치단체 등 3곳의 비영리법인에 기부하기로 했다. 최소 7100만 달러를 공화당과 보수운동단체에 내놓은 것. 오바마 낙선운동에 1억 달러(1170억원) 이상을 쓸 용의가 있다는 그의 말이 빈말이 아님을 입증한 셈이다.

이러한 그의 ‘돈 폭탄’에 대해 민주당과 진보진영, 연방정부는 물론 공화당 내에서조차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2002년 정치자금개혁법 주창자였던 매케인 상원의원은 우회적으로 유입된 외국 자본이 미국 선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아델슨의 거액 지원을 비난했다. 라스베이거스 샌즈그룹의 수익 대부분이 마카오에 있는 카지노에서 나오고 있음을 겨냥한 것이다.

상원의원(메인주)과 국방장관을 지낸 공화당의 윌리엄 코언은 지난주 워터게이트 40주년 토론회에서 “현재 미국에서도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충분하다”면서 “기업이나 개인이 선거자금을 무제한 제공하는 정치 관행은 정말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지난 7일 뉴욕타임스·CBS 조사에서 연방대법원에 대한 미 국민들의 지지율은 44%로 내려앉았다. 대법관들이 법리(法理)가 아니라 개인적·정치적 편향에 따라 판결한다는 의견이 76%나 됐다. 한 네티즌은 이 기사의 댓글에서 2010년 1월의 정치자금 판결이 신뢰 상실의 주원인이라며 이 판결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최고가 응찰자에게 팔아먹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