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내적인 빛’에 따른 삶을 산 퀘이커교의 창시자 조지 폭스 (上)
입력 2012-06-18 18:27
기성 교회에 실망, 프로테스탄트·천주교·국교회와 다른 ‘제3의 종교운동’
“신의 음성을 듣고 그에 따라 사십시오!”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 앞에 한 죄수가 끌려 왔다. 호국경은 위풍당당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 앞에 서면 누구든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죄수는 몰골은 초라했지만 당당했다. 이 죄수는 상습범이었다. 1649년에 노팅엄에서 체포된 적이 있었고, 1651년 더비에서는 신성모독죄로 기소되었다. 이후에도 질서를 어지럽히고 미혹한다하여 여러 번 체포되었다. 그는 정식 목회자가 아니면서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설교를 했고, 설교를 통해 영적 체험과 소명을 강조했다. 영적 체험과 소명이 없는 기성 교회와 목회자들을 비판했다. 기존 교회와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그래도 이 죄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친구들’이라는 이름의 무리를 이끌며 영국 전역을 방랑하며 설교를 했다. 크롬웰 정부는 이들이 왕당파의 음모에 가담해 정부를 타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의심을 했다. 그러나 크롬웰은 그 죄수와 대화를 한 뒤 그러한 의도가 없다는 확신을 가졌다. 오전 내내 이루어진 대화에서 그 죄수는 ‘친구들’에 대해 설명하고, 크롬웰에게 신의 음성을 듣고 그것에 따라 살라고 진언해 주었다. 폭스가 떠나려 할 때, 크롬웰은 눈에 눈물이 가득차서 이렇게 말을 했다.
“다시 나의 집으로 오게나. 그대와 내가 하루 한 시간 만이라도 같이 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서로 더욱 가까워질 것일세.”
크롬웰을 감동케 한 이 죄수는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였다. 조지 폭스가 이끈 당시의 신앙 운동은 퀘이커 운동이었다. 프로테스탄트, 천주교회 그리고 영국 국교회와는 전혀 다른 제 3의 종교운동이었다. 퀘이커라는 말은 치안판사 베네트가 조지 폭스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향해 비꼬는 말에서 유래했다. 베네트는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면 몸을 떨게 되리라던 폭스의 말을 인용해 폭스와 그의 친구들을 ‘몸을 떠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퀘이커들(Quakers)’이라고 조롱해 불렀다.
조지 폭스는 1624년 7월 청교도 마을인 영국 중부의 레스터셔, 지금의 페니 드레이튼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크리스터 폭스는 이웃들이 ‘공정한 크리스터’라 불릴 정도로 정직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방직공이었다. 그의 집안은 하층에 가까웠다. 집안 형편으로 볼 때, 폭스가 공식적인 교육을 받을 기회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십대 시절, 목회자가 될 것을 바라는 친척들의 희망을 뒤로한 채 구두 제조업과 목축업을 겸하는 사람에게서 양치기 생활을 했던 점도 이런 것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폭스는 글은 쓰고 읽을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는 외로운 양치기 생활 동안 종교와 신앙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며 목회자가 되고자 하는 꿈을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이때 그는 노아,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을 생각하며 정규적인 제도 교육이 목회자가 되기 위한 필요한 자격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성서의 위대한 인물들은 양치기 생활을 통해서도 훌륭한 목회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목회자가 되기에는 아직 확고한 신앙을 가지지 못했다. 당시에는 로마 가톨릭, 영국 국교도, 청교도들이 서로 나뉘어 싸움을 하고 있었고, 그 사이를 틈타 분파적인 교회들도 생겨나 정말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신앙에 대한 그의 고민은 커져만 갔다. 18세 때에 정말 어느 것이 진정한 신앙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 집을 떠나 수많은 사람들과 목회자를 찾아 다녔지만 실망만 안고 돌아왔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내 몸은 그야말로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으로 메말라 있었고, 그러한 고통들이 너무나 커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거나 장님으로 태어나 사악하고 허망한 것들을 보지 않게 되거나, 벙어리로 태어나 헛되고 나쁜 말들이나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말들을 결코 듣지 않기를 바라는 게 나았을 것 같았다.”
폭스는 이제 다른 사람이나 글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만을 온전히 바로 알고자 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바로 알 수 있는 것인가? 사람들이 성경을 읽기는 하였으나,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제대로 안 것일까? 폭스는 오랜 고민 끝에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성령이 함께 해야 성경을 올바로 알 수 있다고 깨달았다. 그 이유를 그는 나중에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통해 성경을 주셨다는 것과,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배웠던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과, 바로 그 영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은 성경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어떻게 이런 깨달음을 갖게 된 것일까 ? 그는 이런 종교적 깨달음을 갖게 된 것은 주께서 내 마음을 여시어 된 일이라고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해 성경에서 읽기는 하였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나 이제 계시를 통해 열쇠를 가지신 분이 그 문을 여셨으며 생명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로 나를 인도하셨다.”
폭스는 이런 깨달음을 얻고 난 후, 1643년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영적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영적 방랑 생활을 하면서 영적인 열림의 체험을 한 다른 사람들을 열심히 찾아 다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가 볼 때, 그런 체험을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참된 신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나누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게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어떤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한 분, 한결같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그분만이 네 처지를 말해줄 수 있다.”
그는 이 음성을 듣고, 너무 좋아서 깡충깡충 뛸 정도였다. 1646년에 체험한 이 음성을 그는‘내적인 빛’이라 표현했다. 그는 ‘내적인 빛’을 ‘그리스도의 신령한 빛’으로 설명하였다. 이 ‘내적인 빛’에 따라 살 때 그는 타락 전의 아담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회복한 온전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내적인 빛’에 의한 영적 각성 후 폭스는 진리를 전파하러 전국을 돌기 시작했다. 그는 시장에서도, 설교가 끝난 교회에서도 설교를 했다. 그는 설교를 통해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목회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해야만 목회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에게 중요한 것은 영적인 체험과 소명이다. 조지 폭스는 교회를 돈벌이로만 생각하는 직업적인 목회자들을 부정했다. 그는 돈벌이로 이용되는 교회를 영은 없고 건물만 있는 ‘뾰족집’으로 불렀다.
“목사들의 세상적인 생각은 내 삶에 상처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을 뾰족집으로 불러들이는 종소리를 듣기가 괴로웠다. 그것은 마치 목사들이 자신의 상품을 팔기 위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시장의 종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최고의 주교에서 가장 낮은 사제에 이르기까지 성경을 팔아, 설교를 통해 벌어들인 그 엄청난 돈이란! 세상에 어떤 장사와 비할 수 있겠는가?”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