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철환] 앞 못 보는 철학자
입력 2012-06-18 18:26
“꽃들은 아는 게지. 슬픔도 기쁨도 시간 따라 모두 지나간다는 걸…”
내겐 잊을 수 없는 아저씨가 있다. 이웃집에 살았던 아저씨는 앞을 볼 수 없었지만 마음이 따뜻한 분이었다.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아저씨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아저씨는 오랫동안 안마 일을 했는데, 손가락 관절이 상할 대로 상해 손가락 마디 끝을 다섯 개 잘라내야 했다. 아저씨는 손가락 수술 후 방값이 더 싼 동네로 이사했다. 아저씨가 이사한 곳은 쪽방이었는데 쪽방마다 일련번호가 적혀 있었다.
아저씨를 찾아 쪽방으로 처음 갔던 날, 아저씨는 백열등 아래 앉아 라면을 먹고 있었다. 아저씨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아주었다. 손님에게 대접할 게 라면밖에 없다면서 아저씨는 라면을 끓여주었다. 배고팠던 터라 허겁지겁 라면을 먹었다. 라면을 먹는 동안 아저씨는 나를 위해 하모니카로 ‘클레멘타인’을 연주해 주었다. 슬픈 마음이 들어 라면이 자꾸만 목 위로 올라왔다.
옆방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는 아기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옆에서 읽는 것처럼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들려왔다.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다.
“여기 있으면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 밤만 되면 아기 엄마가 동화책을 읽어주거든. 어찌나 또렷하게 들리는지 나에게 이야기 해주는 것 같다. 아기 웃는 소리도 들리고, 아기 우는 소리도 들리고, 조용한 새벽이면 조금 뻥쳐서 아기 숨 쉬는 소리도 들리거든. 칸칸마다 벽이라고 있지만 말이 벽이지 벽이 아니야. 한데 섞여 살 수 없으니까 베니어 합판으로 겨우 갈라놓았을 뿐이지. 아기는 마음 놓고 울 수 있지만, 어른은 마음 놓고 울 수 없으니 갑갑하고 한심한 거지. 부부싸움을 할 때도, 사랑을 나눌 때도, 옆방 사람 들리지 않게 해야 하니 가난이 오죽 서럽겠냐. 방귀 뀌는 소리까지 들리니 아주 환장할 노릇이다. 이거 봐라, 이 거….”
아저씨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으로 벽을 살살 밀었다. 조악하게 벽지가 발라진 벽이 쿨렁쿨렁 흔들렸다. “아저씨, 옆집 사람 소리 크게 들리면 짜증나지 않으세요?” 하고 조심스럽게 내가 물었다. 아저씨는 쓸쓸히 웃으며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옆집 사람이 아니라 옆방 사람이다. 아기 울음소리 때문에 새벽잠 깨면 짜증도 나지. 하지만 어쩌겠냐? 가랑잎이 솔잎 보고 바스락거리지 말라고 소리치면 쓰겠냐? 바람 부는 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처지에 서로 위로는 못할망정 말이다…. 가끔은 짜증날 때도 있지만 적막하지 않아서 좋다.”
라면을 먹고 아저씨를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망가진 고물 자전거와 못 쓰는 의자와 부서진 책상 따위가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저씨는 난간 쪽으로 더듬더듬 걸어가더니 커다란 화분 하나를 들고 왔다. 아저씨가 내게 물었다. “지금 이 화분에 꽃이 피어 있는 건 알겠는데, 무슨 꽃인지 모르겠다. 무슨 색깔인지도 모르겠고. 꽃잎이 크고 둥근 걸 보면 접시꽃 같기도 한데, 맞니?” 아저씨가 들고 있던 화분을 건네받으며 붉은색 접시꽃이라고 말해주었다. 아저씨가 다시 말했다.
“나 어릴 적에 우리 집 마당에 접시꽃이 참 많았더랬다. 그래서 접시꽃은 내가 잘 알지. 해바라기나 목단 꽃이나 접시꽃은 꽃송이가 아주 크잖아. 그나저나 접시꽃을 누가 여기에 심어놨을까? 서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꽃인데 말이야. 하여간에 꽃은 장소를 따지지 않아서 좋아. 양지는 양지대로 양지식물 피어나고, 음지는 음지대로 음지 식물이 피어나니까 말이야. 더우면 덥다고 불평하고 추우면 춥다고 불평하고 바람 불면 바람 분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보다 꽃이 훨씬 낫지 싶다. 꽃들은 늘 묵묵하잖아. 피웠다고 뻐기지도 않고 졌다고 울지도 않고. 꽃들은 아는 게지. 슬픔도 기쁨도 시간 따라 모두 지나간다는 걸…. 나는 네가 글 쓰는 일 때문에 너무 초조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일엔 때가 있으니까 조급하게 마음먹지 마라….”
아저씨는 당시의 내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향해 아저씨가 나직이 말해주었다. “금이나 은 한 줌을 얻으려면 수백 톤, 수천 톤의 돌과 흙을 파내야 하거든. 꽃송이 수만큼 열매 맺는 나무는 없어. 힘내라.”
이철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