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미소천사’ 당신이 그립습니다… 워싱턴DC 흑인동네 주민들, 강도에 희생된 가게 주인 추모행렬

입력 2012-06-17 19:55


지난 8년 동안 미국 워싱턴DC 북동부의 흑인 밀집지인 H스트리트 주민들에게 ‘그레이스 델리’는 단골가게 그 이상이었다. 음료수 및 샌드위치 등 간식을 파는 이 가게 주인 임해순(64·미국명 준 림) 특유의 친절과 환한 웃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4일(현지시간) 오전 6시30분쯤 가게 문을 열던 임씨가 무장강도로 보이는 범인의 총에 맞아 숨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DC메트로폴리탄 경찰은 “이번 사건을 강도 및 살인 사건으로 보고 수사하고 있으며 용의자는 임씨가 가게 문을 여는 순간을 노려 범행한 것 같다”고 밝혔다. 이민 1세대인 임씨는 지난 8년간 주로 이 지역 흑인 주민을 상대로 가게를 운영해 오다 최근 은퇴하려 가게를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임씨 사망 소식에 지역주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다음날인 15일 정오부터 2시간 동안 가게 앞에서 열린 추모집회에는 대부분 흑인인 50여명의 고객과 임씨 친구들이 모였다.

셔터가 굳게 닫힌 가게 정문에 붙은 포스터에는 노란색 스마일 캐릭터 밑에 ‘준, 매일 당신의 미소를 나눠줘서 고마웠어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임씨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붙은 다른 포스터에는 ‘준, 당신의 미소가 그리울 겁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등 고객들의 글이 빼곡히 적히기 시작했다. 카드와 엽서, 꽃다발과 촛불도 놓였다.

주민들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임씨가 얼마나 이 동네에서 사랑받았는지,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단순한 가게 주인 이상의 존재였는지 얘기했다.

손님이었던 베티 하트는 “준은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마음이 따뜻한 이였다”며 “손님이 돈이 없을 땐 공짜로 음식을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다른 고객은 “준은 손님의 이름은 기본이고, 어떤 메뉴를 좋아하는지도 알고 세심히 챙겨줬다”고 회고했다.

임씨 아들인 도일(미국명 피터)씨는 추모집회에 온 손님들에게 가게에 있던 식료품을 무료로 나눠줬다. 아마 어머니도 이렇게 하기를 원했을 것이라면서. 도일씨는 “부모님은 곧 가게와 집을 팔고 바닷가로 이주해 은퇴생활을 할 계획이었다”면서 “어머니가 주민들로부터 이렇게 사랑받은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도일씨는 다시 가게를 열 생각이 없다고 했다. WUSA9, WJLA, ‘워싱턴 이그재미너’ 등 지역 언론들은 15일 임씨 사망과 추모 행사를 주요 뉴스로 다뤘다.

워싱턴=글·사진 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