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깨달아야 할 일생일대의 가장 위대한 깨달음이 있다. 그것은 자기가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내 인생을 스스로 책임질 수 없으며, 죽음 아래 있는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깨달음이라고 하기에 너무 싱겁지 않은가?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왜 그것이 그렇게 위대한 깨달음인가?
문제는, 어린아이도 다 아는 사실을 사람은 일평생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마치 영원히 사는 존재인양 사는 것이 문제다. 한 대학의 학장님이 임종을 앞두고 있었다. 그의 부인이 목사님께 심방을 요청했다. 남편에게 제발 임종을 준비하고 유언을 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심방 온 목사님을 향하여 남편이 했던 첫마디는 “내가 왜 죽어”였다. 이것이 인생의 실상이다.
인생은 무지하다. 가장 쉬운 것, 그러나 동시에 가장 어려운 것은 인생의 실존 상황과 인생 한계를 깨닫는 것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나아만이라는 사람이 가장 좋은 예다. 그는 대국의 국방장관이요 구국의 영웅이다. 그러나 한센병이라는 죽음의 병을 가진 사람! 그가 우연한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찾아간다. 선지자의 집에 가까이 왔을 때, 엘리사 선지자는 자기의 종을 시켜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잠그라는 처방을 한다. 이 말을 들은 나아만은 불쾌해서 화를 냈다. 자기는 귀빈 중의 귀빈인데 선지자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종을 시켜서 전갈을 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요단강보다 좋은 강이 시리아에 많은데 선지자가 일러준 처방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화를 내고 돌아서는 순간, 주위의 수행원들이 그에게 결정적인 말을 해 준다. ‘만일 선지자가 더 어려운 명령을 했으면 당신이 순종하지 않았겠는가?’ 쉽게 말하면 당신은 지금 스스로 군대장관이요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는데, 정신 차리라는 말이다. 당신은 한센병 환자요 죽음 아래 있는 피조물에 불과하며, 당신은 지금 화를 내고 돌아갈 처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렇게 말이 많으냐’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그는 일생일대의 위대한 깨달음을 가진다. ‘내가 바로 그런 존재구나! 나는 군대장관도 구국의 영웅도 아니라, 죽음 아래 놓인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구나!’ 이 깨달음이다. 이전에도 자신이 한센병자였다는 것을 몰랐던가? 아니다. 알았다. 그러나 자신을 정직하게 제대로 깨닫는 순간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위대한 깨달음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한 첫째 복은 심령이 가난해지는 복이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창조주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다. 이것이 가장 결정적인 복이다.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인생의 크고 작은 일들은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가장 쉬운 것을 깨닫지 못하는 인생, 그 인생을 보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답답하실까? 지금 당신은 제대로 깨닫고 있는가?
<서울 내수동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