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피임약 일반약 전환… 醫-藥 밥그릇 싸움 번져

입력 2012-06-15 20:56


사후(긴급)피임약의 일반약 전환을 둘러싼 논란이 의·약사 간 ‘밥그릇싸움’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종교계와 일부 시민단체는 사후피임약이 사실상의 낙태약이며 무분별한 성문화를 조장할 것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은 반면 여성·소비자 단체는 신속하고 안전한 피임이 우선이라며 일반약 전환을 찬성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15일 의·약계와 종교계, 여성 및 소비자단체 등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 여의도 한국화재보험협회에서 공청회를 열고 피임제 재분류안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공청회엔 종교단체와 시민단체 인사 300여명이 참석해 찬·반 입장을 담은 푯말을 들고 열띤 토론을 지켜봤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지난 7일 사후피임약을 전문약에서 의사처방 없이 약국 판매가 가능한 일반약으로, 사전피임약은 일반약에서 의사 처방이 필요한 전문약으로 전환하는 내용의 의약품 재분류 추진 방안을 발표했다.

공청회에선 특히 사후피임약의 약국 판매에 대해 의료계와 약사계의 찬반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렸다. 최안나 대한산부인과학회 정책위원은 “사후피임약은 고용량의 호르몬으로 부작용과 합병증 위험이 커 전문가에 의한 피임 진료를 정착시켜야 한다”면서 일반약 전환에 반대했다. 최 위원은 “사후피임약이 사전 피임 없는 성관계 후 누구든지 언제 어디서나 즐겨 사용하는 피임약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며 “사후피임약이 일반화되면 콘돔, 피임시스템 시술 등 사전 피임이 줄어 원치 않는 임신이나 불법 낙태가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반면 김대업 대한약사회 부회장은 “이미 사후피임약을 산부인과가 아닌 진료 과목에서 처방받거나 여성이 아닌 남성이 대신 처방받는 편법이 만연했다”면서 “약사의 복약 지도로도 안전하게 복용할 수 있어 전문의사가 환자와 대면해 처방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같은 사안을 놓고 의·약계의 시각이 상반되게 갈리는 데 대해 의약품 사용에 대한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밥그릇싸움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종교계와 여성·소비자 단체는 기존의 상반된 입장을 견지했다. 강인숙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운동본부 생명위원은 “사후피임약의 성분은 정상적인 배란을 방해하고 수정란 착상을 막는다는 점에서 낙태약”이라며 “지금까지 어떤 연구도 사후피임약이 수정된 난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밝혀내지 못한 상황에서 식약청이 낙태약이 아니라고 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낙태반대운동연합 김현철 회장도 “현재 우리나라의 피임 인식도와 사전피임율, 피임약 오남용 실태 등을 고려했을 때 사후피임약의 일반약 전환은 올바른 판단이 아니다”면서 “여성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사후피임약 선택에 쓸 게 아니라 남성의 피임을 요구하고 긴급피임약을 거부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반면 김인숙 한국여성민우회 상임대표는 “여성들이 누구나 손쉽게 사후피임약을 이용할 수 있도록 일반약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정의실천연합 소속 정승준 한양대 의대 교수도 “사후피임약은 긴급 상황에 처했을 때 먹는 약이다. 긴급 약의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윤미 녹색소비자연대 본부장은 “현실적으로 성관계 이후 찾아 온 여성에게 의사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복용에 따른 주의사항 정도에 불과하다”며 “이는 약국에서의 복약 지도와 표시 강화로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