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에 가위눌린 늙음과 고독… 에밀 아자르 마지막 장편 ‘솔로몬 왕의 고뇌’
입력 2012-06-15 18:28
러시아 모스크바 태생의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1914∼1980)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그로칼랭’ ‘자기 앞의 생’ ‘가면의 생’을 발표한다. 그가 ‘가면의 생’을 내면서 “이것은 내 마지막 책이다”라고 밝혔기 때문에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네 번째 소설이 나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3년 뒤인 1979년 2월, 예상을 뒤엎고 장편 ‘솔로몬 왕의 고뇌’(마음산책)를 출간한다.
알려진 대로 로맹 가리와 24세 연하인 미국 여배우 진 세버그는 서로 가정이 있었으나 각각 이혼을 하고 1962년 정식으로 부부가 됐다. 그러나 세버그는 1979년 8월 자살하고 만다. 로맹 가리는 1970년 정신적 혼란과 갈등을 겪던 세버그의 요청으로 이혼하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과 이해에는 변함이 없었던 것 같다. 그 역시 1980년 12월 1일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화자인 ‘장’은 개인택시 1대를 동료 두 명과 나누어 운행하는 한편 소형 가전제품을 다루는 수리공으로 일한다. 소설은 그의 택시에 여든네 살의 노인 솔로몬 루빈스타인이 승차해 말을 거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부끄러운 일이오. 세상이라는 이 ‘기성복’은 날이 갈수록 입고 있기가 무거워지는 것 같소.”(11쪽) 솔로몬은 그 택시를 자신의 ‘전용’으로 쓰고 싶다고 장에게 제안하면서 수표를 써준다. 장의 인생에 솔로몬이 성큼 들어온 것이다.
솔로몬은 유명한 프레타포르테(고급 기성복) 사업가였다. 지금은 은퇴해서 ‘봉사의 구조회’라는 구호 단체에 자금과 사무실을 후원하고 있는 그는 신이 미처 돌보지 못하는 이들을 보살피는 역할을 자임한다. 그의 행동은 자신을 기성화된 인간 삶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하는 의식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큰 상처가 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4년 동안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지하 한구석에서 숨어 지냈으며, 그때 자신을 외면한 샹송 가수 코라 라므네르에게 40여 년간 원한을 품고 살아온 게 그것이다. 그는 자신이 반평생 풀지 못한 코라에 대한 앙금이 가장 기성화된 사랑 방식임을 깨닫지 못한다.
코라는 예순다섯 살이지만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가 이브 몽탕을 키웠듯 자신도 젊고 유망한 배우를 길러내고 싶다는 꿈을 품고 있다. 솔로몬이 보내 코라를 알게 된 장은 코라의 꿈에 부합하는 젊은이여서 더욱 친밀감을 갖는다. 장은 솔로몬과 코라의 사이에서 이들의 관계를 재정립시키려고 애쓴다. “그분은 원한을 품고 계신 게 아니에요. 마드무아젤 코라. 그저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뿐이에요!”(371쪽)
장은 솔로몬에게도 이렇게 말한다. “이제 그분을 용서하셔야 합니다. 솔로몬 선생님. 선생님의 그 전설적인 너그러움으로 말입니다.”(376쪽) 이런 와중에 코라가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두 사람은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가지만 코라는 솔로몬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도대체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는 장의 질문에 코라는 이렇게 말한다. “오, 나도 모르겠어. 그러니까 전반적인 거야. 난 운명에 휘둘리는 데 진력이 났어. 그런 걸 늙음과 고독이라고들 하지. 내 말 알겠어?”(384쪽)
소설은 장의 중재로 두 노인이 함께 프랑스 남부의 니스로 여행을 떠나면서 끝맺지만 로맹 가리의 실제 삶은 더 비극적이었다. 그럼에도 소설은 인간의 운명을 중의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로맹 가리 신화에 마침표를 찍는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