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현길언] 서대문 역사박물관
입력 2012-06-14 18:36
“‘민족’에 ‘민주’ 합성하는 것은 서대문형무소의 역사적 의미 훼손하는 처사”
꽃샘추위가 목덜미를 움츠리게 하던 오후, 언제부터 가본다고 벼르던 ‘서대문 역사박물관’을 찾아갔다. ‘서대문형무소’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데 ‘역사박물관’이라니? 일제 강점기 우리 역사의 실상을 보여주는 또 다른 박물관이 있는가 생각하기도 했다.
이름이야 어떻든 박물관이 된 형무소 내부를 관람하면서 나라 잃은 민족의 아픔과 그 고통을 감내하면서 민족혼을 지켰던 분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옷깃을 여미게 했다.
형무소 내부의 여러 곳을 관람하고 코스를 따라 마지막 건물로 들어서려는데 형무소 붉은 벽돌 건물 외벽에 걸려있는 화려한 현수막들이 눈길에 잡혔다. ‘당신의 역사를 기억합니다. 서대문 독립 민주 페스티벌’ ‘독립과 민주, 자유와 평화를 외쳤던 갈망의 소리를 듣습니다’ 등.
현수막에 쓰여진 감동적인 언어를 읽으면서 구청이 주관하는 행사의 면모를 알게 되었다. 이 행사와 관련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고 하는 목사, 학자, 법조인, 사회운동가, 문인들의 현수막도 화려하게 형무소 외벽에 걸려 있었다.
최근 십 몇 년 동안 정치권과 일부 학자들이 손잡고 ‘역사 바로 세우기’란 명분을 내세워 역사를 이념화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을 벌였는데, 그 바람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서대문 역사박물관에까지 불어오고 있구나 생각했다. 우리는 그동안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을 통해 한국인에게는 ‘민족’과 ‘민주’라는 이념이 정치적 정서로 짙게 깔려있음을 보게 된다.
서대문형무소를 일제의 반민족적 행위에 맞서 민족정신이 살아 숨쉬는 공간으로 설정하고, 여기에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개인사까지 포함시킴으로써 ‘민족과 민주정신의 상징물’로 성역화하려는 의도도 이러한 대중정서와 무관하지 않다.
구청으로서는 매우 기발한 발상이었겠지만 그것은 상당히 정략적이고 비역사적인 처사다. 차라리 우리 근·현대사의 축소판이 된 서대문형무소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주었다면 오히려 ‘역사박물관’으로서 제 몫을 탄탄히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서대문형무소는 실정법을 위반한 사람들이 일정 기간 수형생활을 했던 곳이다. 일제의 악법에 의해 독립투사들이 고초를 당했던 곳이지만, 다양한 유형의 범법자들이 수형생활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혼란스러운 해방 정국에서는 소위 사상범들이 수감되었고, 친일행각을 벌였던 반민족인사들도 여기 갇혔다. 북한군이 서울에 입성하자 우익 인사들이 이곳에 잡혀들어갔고, 정치 혼란기에는 반독재 민주화 인사들이, 4·19가 일어나자 부정선거 원흉들이, 군인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에는 다시 반독재 민주인사들이, 시간이 지나서는 민주인사를 탄압했던 권력의 하수인들이 수감되었다. 이처럼 이곳은 우리의 험난하고 왜곡된 역사의 실상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공간이다.
서대문형무소를 팩트(fact)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역사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 한국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교과서가 될 것이다. 서대문형무소는 영욕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한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어서 가치 있는 역사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서대문구청 입장에서는 부끄럽고 뒤틀린 역사는 숨겨두고 자랑스러운 역사만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또 다른 비역사적인 사업을 벌여놓게 되었다.
‘서대문 독립 민주 페스티벌’은 역사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행사로 오해 받을 만하다. 민족과 민주정신에 편승하여 이곳을 그 산실(産室)처럼 치장하는 것은 역사를 억지로 미화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서대문 역사박물관은 ‘민족’과 ‘민주’ 정신을 합성하기 위해 형무소의 남은 공간에 일부 인사들의 민주화 투쟁 자료들을 전시하고 기념하기 위한 일을 하고 있다. 이것은 ‘서대문형무소’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훼손하는 비역사적인 처사다. 부끄러운 역사를 숨기지 않고 보듬어 안아 그 부끄러움을 함께 나누는 것이 진정한 역사 사랑이고 소위 민족주의사관의 핵심이다.
현길언 소설가 (본질과 현상 편집·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