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화대혁명의 시작은 ‘참새 소탕전’… ‘중국인 이야기’
입력 2012-06-14 17:58
중국인 이야기/김명호/한길사
“1955년 한 농민이 ‘참새들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탄원서를 중국 공산당 중앙당에 보냈다. 농업부는 동물연구의 권위자에게 자문을 구했다. ‘참새의 식성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를 한 적이 없다. 박멸이 필요한지 감히 말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나 며칠 후 마오쩌둥의 입에서 ‘12년 내에 전국의 쥐 참새 파리 모기를 섬멸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4해(四害)’라는 말이 처음 출현했다.”(15쪽)
당시 전국문화예술인연 주석 궈모뤄(郭沫若)의 동작은 빨랐다. 그는 “수천 년간 우리의 양식을 수탈하여 저질러온 죄악, 이제야 관계를 청산할 때가 왔다”며 참새에게 선전 포고를 했다. 1958년 4월 19일, 소통 작전 첫날, 참새 8만3249마리가 섬멸됐다. 섬멸 작전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칭다오에서는 하루에 6412마리를 포살한 사람이 전국적인 영웅으로 등장했다. 인민의 적을 때려잡는 광경은 보기만 해도 통쾌했다. 10년 뒤, 참새 소탕작전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홍위병 완장을 찼다.
모두 7부로 구성된 책의 1부는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과정의 내막을 보여주는데 그 도입은 뜻밖에 ‘참새 소탕전’이다.
‘두부와 혁명’은 프랑스 파리 교외의 두부공장에서 중국 혁명의 주역이 탄생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에피소드다. 그 중심에 1907년 프랑스에 유학한 리스쩡(李石曾)이 있다. 그는 청나라 군기대신을 지낸 이홍조의 막내아들이었다. 19세 때인 1900년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 프랑스 유학을 결심하고 아버지와 경쟁관계에 있는 양무파(洋務派)의 영수 리훙장(李鴻章)을 찾아간다. 리훙장은 곧 프랑스 공사로 부임하는 쑨바오치(孫寶琦)를 돈으로 매수해 수행원 자격으로 파리에 가라고 알려준다.
리훙장의 예측은 적중했고 쑨바오치를 따라 파리에 온 그는 고향에서 마시던 두유가 그리워 동향 후배에게 편지를 보낸다. “두부를 만들 농민을 모집해 프랑스까지 인솔해라.” 농민 40명이 프랑스에 왔고 프랑스 여인 70명까지 고용해 파리 근교에 두부공장을 차렸다. 사업에 성공하자 리스쩡은 부친이 고관으로 있는 청 왕조의 전복을 위해 쑨원(孫文)에게 혁명 자금을 지원하고 파리에 야학을 개설해 유학생을 모집했다. 1910년에서 1920년까지 10년간 17차에 걸쳐 3000여명의 가난한 중국 청년들이 프랑스에 건너와 공부했다.
1922년 6월 18일 일요일 오전, 파리 교외의 불로뉴 숲에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지에 흩어져 있던 근공검학생 대표 18명이 집결했다. 중국 공산당 초대 서기 천두슈(陳獨秀)의 아들 천옌녠(陳延年)과 왕뤄페이(王若飛), 리웨이한(李維漢) 등 앞으로 국민당 및 공산당사에 큰 획을 긋게 될 청년들이었다. 덩시센(鄧希賢·훗날의 덩샤오핑)은 나이가 어려서 참석하지 못했다. 이 모임에서 ‘소년공산당’ 창당을 주창하며 입당 선서를 하자고 제안한 이가 바로 이탈리아에서 온 저우언라이(周恩來)였다. 저우언라이는 소년 시절부터 협상력이 뛰어났던 것이다. “모든 원인은 혁명과 전혀 상관없는 두부였다. 두부는 수천 년간 중국인에게 가장 정감어린 식품이다. 분쟁의 소지를 제공한 적이 없다고들 흔히들 말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141쪽)
40년 가까이 중국의 속살을 파헤쳐온 김명호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는 이처럼 ‘듣도 보도 못한’ 에피소드로 중국 근현대사의 이면을 꿰뚫는다. 이 책을 시작으로 모두 10권을 펴낼 예정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