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에 저항, 경계를 허물다… ‘오바마, 어머니의 길’

입력 2012-06-14 21:50


오바마, 어머니의 길/재니 스콧/은행나무

“사진에 아들이 있었지만 내 눈은 어머니에게 이끌렸다. 처음 사진을 보았을 때는 좀 놀랐다. 튼튼한 샌들을 신고 똑바로 서 있는 제법 살집이 있는 흰 피부의 여인. 그리고 그녀 왼쪽으로 검은 피부에 유연해 보이는 인물이 서 있었다. 아들의 고무줄 같이 유연한 몸에선 절제, 나아가 금욕주의까지 읽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상당히 살찐 모습으로 이미 오래전 식욕이란 쾌락과 해부학적 운명의 힘에 굴복한 상태였다.”(‘프롤로그’에서)

미국 뉴욕타임스의 재니 스콧은 2008년 미 대선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의 인생을 다룬 기사를 여섯 차례에 걸쳐 싣는다. 그 후 신문사를 나와 2년6개월 동안 대통령 오바마의 어머니 스탠리 앤 던햄(1942∼1995)의 베일에 싸인 삶을 쫓아다닌다.

던햄이 15년에 걸쳐 완성한 1000쪽에 걸친 박사학위논문을 샅샅이 살피는가 하면 200여명에 달하는 동료, 친구, 교수, 친척, 고용주, 지인, 그리고 그녀의 두 자녀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2010년 1월, 오마바와 대통령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눴을 때 오바마는 어머니를 “순진한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현명하며 지적으로 세련된 사람”으로 기억했다. 오바마의 이복동생 마야 수토로-응은 “어머니의 힘의 바탕은 감동할 줄 하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던햄은 오뚝이 같은 사람이었고 늘 중앙에서 벗어난 사람이었다. 던햄의 어릴 적 이름은 스탠리였다. 아들을 바랐던 아버지가 남자 이름을 붙이는 바람에 학교에서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지극히 평범한 중부 캔자스 중산층 가정의 백인 소녀였다. 그녀가 다닌 시애틀의 머서 아일랜드 고등학교에는 전교에 흑인이 단 한 명뿐이었다. 그런 시대에 머지않은 훗날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유학생과 결혼을 결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고교 시절에 동창생 바이어스와 함께 차를 타고 가출해 샌프란시스코의 소년원에 수용됐다가 풀려난 적이 있었다. “한밤중에 길을 떠난 이 여행에서 그 후 스탠리 앤의 인생에 다가오게 될 사건들의 전조를 읽고 싶은 유혹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려는 자세, 되풀이되는 주제 같은 어떤 경향이 집안 역사 전반에 흐르고 있었다. (중략) 실제로 스탠리 앤은 그 후 평생 동안 길을 떠나 여행을 했던 것이다.”(76∼77쪽)

고교 졸업 후 그녀는 가구업을 하는 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이사를 갔다. 하와이대에 진학한 던햄은 이름을 앤으로 바꿨다. 앤은 하와이대 동서양센터 러시아어 수업에서 케냐 출신인 버락 오바마 시니어를 만난다. 그는 케냐 독립주의자였던 톰 음보야가 새로운 지도자 세대를 교육하기 위해 미국인으로부터 기금을 모아 데리고 온 80명의 젊은이 중 한 명이었다. 하와이대의 첫 아프리카 출신 유학생으로 여겨지는 그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곳곳에서 연설 초청을 받고 지역 신문들이 인터뷰를 했다. 동료들은 “오바마(시니어)는 자석같이 주변을 빨아들이는 성격이었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웅변이 됐다”고 회상했다.

앤은 그해 가을 오바마 시니어와 사귀기 시작한다. 당시 흑인은 하와이 전체 인구의 1%도 안됐고 하와이를 제외한 다른 주에선 인종 간 결혼이 허용조차 되지 않던 시기였다. 1961년 2월, 두 사람은 결혼했다. 18세였던 앤은 임신 3개월째였다. 아무도 초청하지 않고 결혼식을 올린 앤은 한 학기 만에 학교를 중퇴했다. 버락 오바마 출생 11개월 후 아버지 오바마는 하버드대 박사과정에 진학하기 위해 본토로 떠난다. 그의 목표는 케냐로 돌아가 조국 부흥에 헌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케냐엔 이미 결혼한 부인이 있었다. 앤은 따라가지 않기로 결정하고 1964년 이혼소송을 냈다.

‘흑인과의 사이에 아들을 둔 어린 이혼녀’라는 주변의 시선, 월세를 내기도 벅찬 생활 속에서도 앤은 아버지의 부재(不在)가 아들의 마음속에 분노를 심어주지 않도록 “항상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가르쳤다. 대학에 복학한 앤은 인도네시아에서 온 유학생 롤로 수토로를 만나 1967년 재혼한 뒤 곧 새 남편을 따라 아들과 함께 인도네시아로 건너간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격심한 혼란 속에 있었다. 사람들은 등유와 쌀을 사기 위해 긴 줄을 서야 했고 공산당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로 세력이 커져 있었다. 인도네시아 집은 자카르타 교외의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지역이었다. 뒷마당에 새끼 악어가 노니는 집에서 그 지역의 유일한 외국인 아이였던 오바마는 담 위에 앉은 채 두 팔을 날개처럼 퍼덕대며 까마귀 우는 소리를 내곤 했다. 다른 아이들의 관심을 끌고 싶었고 곧 다들 친구가 됐다. 가톨릭 스쿨에서 아이들은 그를 ‘니그로’라고 불렀으나 오바마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고 당시 친구들은 회상했다.

롤로는 미국계 석유회사에 다니며 승진해 좋은 동네로 집을 옮겼다. 미 대사관에서 영어 가르치는 일자리를 얻은 앤은 매일 오전 4시에 아들을 깨워 영어를 가르쳤다. 아들이 성장과정에서 흑인들과 어울리는 경험을 하지 못한 것을 보상해주려 했던 그녀는 퇴근할 때 흑인민권운동 지도자들의 책을 가져와 건네주곤 했다. 오바마는 열 살 때 하와이의 외할아버지 집으로 보내졌고 앤도 1년 후 남편을 남겨둔 채 하와이로 가서 대학원에 진학해 인도네시아 인류학을 공부했다. 앤과 롤로는 1980년 이혼했지만 앤은 이번에도 위자료나 자녀 양육보조를 전혀 요구하지 않았다.

호놀룰루의 작은 아파트에서 학교에서 주는 학비 보조금으로 생활하던 앤은 박사학위 논문을 위한 현장조사를 위해 인도네시아로 돌아갔고 14세의 오바마는 다시 외조부모 곁에 남았다. 이후부터 앤의 인생은 거의 인도네시아에서 꾸려진다. 1992년 인도네시아 소작농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녀는 포드재단과 인도네시아 은행에서 소액금융대출 프로그램을 담당하며 왕성하게 일하던 중 1995년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53년이라는 길지 않은 인생 동안 그녀는 수없이 자신 안의 경계를 허물었고 세상의 편견에 말없이 대항했다. 성장기의 오바마에게서 ‘부모의 흔적’을 찾아내기 힘들지만, 앤의 지인들은 지금의 오바마 대통령에게 그녀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앤이 아들에게 남긴 유산은 정직함과 직설적 언변, 독립적 사고, 추진력, 경계 허물기였다. 지난해 5월 ‘비범한 여성:오바마 어머니의 공개되지 않은 이야기(A Singular Woman:The Untold Story of Barack Obama’s Mother)’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스탠리 앤 던햄에 관한 유일한 공식 전기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