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풍경’ 쉬다 걷다 추억을 그리다… ‘지리산 둘레길’ 방광∼오미마을 12㎞

입력 2012-06-13 18:47


지리산과 섬진강이 만나는 배산임수의 명당에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하게 자리 잡은 고을이 구례이다. 산은 웅장하고 강은 부드러워 개발의 삽질조차 피해 간 그곳에 농촌의 원형질을 고이 간직한 마을들이 옹기종기 모여 정담을 나누고 있다. 그 형세가 지리산 반달곰의 앞발을 닮아 발가락 사이의 골에 마을들이 위치하고 있다.

지리산 노고단이 뒷동산인 광의면의 방광마을도 그런 마을 중 하나이다. 방광마을의 지리산둘레길 시점과 종점은 수령 500년으로 마을 터줏대감을 자처하는 느티나무 서너 그루 사이에 위치한 마을정자. 느티나무 그늘 아래 놓인 드넓은 평상은 마을 노인과 둘레꾼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며 대화를 나누는 공간으로 옆에는 녹슨 양철지붕이 어울리는 정미소가 오랜 연륜을 자랑한다.

담쟁이덩굴에 둘러싸인 돌담이 멋스런 방광마을의 묵은 집터에서는 상추 마늘 파 등이 자라고 있다. ‘방광’이라는 독특한 마을 이름은 본래 판관이 살았다고 해서 ‘팡괭’으로 불리다 방광으로 변했다. 고즈넉한 마을을 한 바퀴 산책한 지리산둘레길은 들길을 걸어 이내 수한마을로 들어선다.

수한마을에는 유달리 접시꽃이 많다. 담장 아래에서 껑충 자라 환하게 웃음 짓는 접시꽃이 들일나간 마을 노인들을 대신해 둘레꾼을 맞는다. 느티나무 그늘 아래 위치한 마을정자는 한낮의 따가운 햇살을 피하도록 대나무발을 두르고 주변에는 예쁜 꽃들이 피어 있다.

구례의 마을들은 하나같이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에 마을정자와 평상을 두고 있다. 들일하던 농부들이 폭염이나 폭우를 피해 잠시 쉴 수 있도록 대부분의 정자는 유리문이나 대나무발을 두른 것이 특징. 에어컨이나 선풍기는 물론 차를 끓여먹을 수 있는 시설을 갖춘 정자도 있다. 구례의 정자가 마을의 커뮤니티 공간은 물론 둘레꾼들을 위한 쉼터로 각광을 받는 이유다.

벽화가 아름다운 마을길을 걷다 보면 땅바닥에 페인트로 그려진 지리산둘레길 이정표가 뒷산을 향한다. 산 입구의 옹달샘에서 목을 축인 후 대숲 터널을 빠져나가자 구례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산길이 시작된다. 봇도랑을 흐르는 물소리와 뻐꾸기 울음소리를 좇아 쉬엄쉬엄 걷다 보면 둘레길은 당촌마을과 KT지리산수련원 뒷길을 거쳐 피톤치드 향긋한 소나무 숲으로 빨려든다.

소나무 숲길이 끝나는 곳은 화엄사 입구 집단시설지구로 유명한 마산면 황전마을. 지리산탐방안내소와 반달곰생태학습장, 음식점과 숙박시설 등이 있어 지리산 둘레꾼들이 잠시 쉬면서 요기를 하는 곳. 황전마을에서 상사마을까지는 풍광이 아름다운 산길로 이루어져 있다. 아담한 저수지를 지나면 배나무 밭을 비롯한 과수원이 드넓게 펼쳐지고 하얀 띠풀이 무덤을 수놓은 공동묘지도 만난다.

산길이 지루해질 때 쯤 지리산둘레길은 장수마을로 유명한 상사마을로 하산한다. 한옥마을로 유명한 상사마을 주민들의 장수 비결은 고택 쌍산재(雙山齋) 앞에 위치한 당몰샘. 미네랄 성분이 풍부하고 대장균이 없는 당몰샘은 물맛이 좋아 연중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지존지미(至尊至味)’라는 현판이 걸린 당몰샘에서 목을 축이고 나면 발길은 자연스럽게 쌍산재의 소박한 대문 속으로 들어간다.

해주 오씨 일가가 6대째 터를 지키고 있는 쌍산재는 대문 안의 풍경만으로는 고택의 규모를 어림할 수 없다. 안채와 사랑채를 지나 산을 오르듯 대숲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별채와 잔디광장이 나오고 아담한 정원에 둘러싸인 서당채가 나온다. 작은 정원은 온갖 화초와 수목이 주인의 품성을 닮아 깔끔하게 단장돼 있다.

상사마을과 이웃한 하사마을은 신라 흥덕왕 때 형성된 큰 마을로 하사저수지를 품고 넓은 들을 바라보는 마을 풍경이 정겹다. 아직 수확하지 않은 밀밭과 모내기가 끝난 논을 배경으로 느티나무 고목 아래 단정하게 서 있는 마을정자는 한 폭의 풍경화. 마을 입구의 작은등샘에서 목을 축인 지리산둘레길은 밤꽃 향기에 취해 오미마을로 향한다.

토지면의 오미마을은 남한의 3대 명당 중 한 곳으로 꼽히는 길지다. 호남지방의 전형적인 양반가옥인 운조루(雲鳥樓)는 바로 이곳에 위치한다. 운조루는 ‘구름 속을 나는 새가 사는 집’이라는 뜻으로 몇 년 전 배창호 감독의 영화 ‘흑수선’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운조루는 풍수지리학적으로 최고의 명당터라는 ‘금환락지(金環落地)’에 자리 잡고 있다. 금환락지는 선녀가 지상으로 내려와 목욕을 한 뒤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다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길지라는 뜻. 하지만 운조루가 오늘날 관심을 끄는 것은 명당터라는 이유보다 집안 곳곳에 여성을 배려하고, 자식을 엄하게 키우며, 이웃에게 정을 베풀었던 인정 많은 한 가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쇠락했지만 운조루의 안채 부엌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나무쌀독이 보존돼 있다.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쌀독은 가난한 이웃이 쌀을 가져가도록 나눔을 실천한 상징물. 운조루의 ‘타인능해’는 쌍산재의 ‘나눔의 뒤주’와 함께 구례 사람들의 넉넉함을 보여준다. 운조루 100m 아래에 위치한 곡전재(穀田齋)도 조선시대의 한옥. 멀리서 보면 대나무와 돌담이 에워싼 작은 성처럼 보이는 곡전재는 담쟁이덩굴에 둘러싸인 돌담이 어른 키 두 배로, 밖에서는 안을 전혀 들여다볼 수 없다. 하지만 솟을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담한 정원과 마당이 반긴다.

마을마다 부모에게 효성을 다한 아들을 기리는 효자각이 들어서 있고 부잣집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흔적들이 남아있는 곳. 구례 최고의 곡창지대를 에두르는 지리산둘레길 방광마을∼오미마을 구간은 곡전재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구례=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