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배의 말씀으로 푸는 건강] 데자부

입력 2012-06-12 10:50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추운 어느 겨울날 외출에서 돌아온 주인공에게 어머니가 따뜻한 홍차와 조가비 모양을 한 쁘띠뜨 마들렌을 내 오십니다. 마들렌이 촉촉이 부스러져 녹아드는 홍차를 한 숟갈 입술로 가져간 주인공은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과자 부스러기가 섞여있는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주인공은 영혼의 정수를 채우는 쾌감, 삶의 무상을 아랑곳하지 않게 하고 삶의 짧음을 착각으로 느끼게 하며, 이 땅을 초월하는 미지의 기쁨을 느낍니다. 도대체 그 순간 맛본 심연의 감각이 어디서 온건 지 한참을 궁구하던 끝에 불현듯 떠오르는 추억이 있었습니다.

영혼의 정수를 채우는 쾌감

어린 시절 주일날 아침, 레오니 고모의 방으로 아침 인사갔을 때 고모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꽃 달인 물에 담근 후 주시던 그 마들렌의 기억이었죠. 그 기억이 주인공을 왜 그토록 행복감에 젖게 했는지 알지 못하지만 과자에서 비롯된 아련한 시간의 되짚음이 온갖 상념들과 더불어 어린 시절을 보낸 콩브레 마을 모습을 주인공에게 일깨워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한 번쯤 겪어보셨을 겁니다. 처음 가본 곳에서나 낯선 상황 속에서 예전에 이미 와본 듯하고 경험해 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을. 짧게 끝나지만 이런 인상적인 경험을 ‘데자부(deja vu)’현상이라 합니다. 과학적이라기보다 차라리 예술적이라고 할만한 ‘뇌의 초상’의 저자 아담 지먼 박사의 표현을 빌리면 데자부는 ‘지금 겪고있는 일이, 어떤 불분명한,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경험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는 당황스런 느낌’이라고도 합니다. 이 데자부는 여행을 자주 다니거나 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많이 경험합니다. 또 30대에 잘 생기며 아침보다 저녁에 더 흔히 일어난다고 합니다. 피로와 스트레스 때문에 촉발될 수도 있다네요. 데자부 현상의 의학적 설명은 사실은 예전에 경험했던 내용들이지만 당시에 충분히 각성되지 않은 상태로 뇌에 저장되어 있다가 새롭게 겪을 때 이전에 어디서 마주쳤는지 잘 떠올리지 못하는 기억 네트워크의 혼돈에 불과합니다.

일상 벗어나 천상의 경험

더러 우리를 초월하는 듯한 감각을 가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잠시나마 일상에서 벗어나 천상의 경험을 하게되는… 도시에서도 황혼녘, 빌딩 사이로 서편 하늘과 공기조차 붉게 물들이는 노을의 장관을 볼 때, 풋풋한 청년 시절 사랑에 빠져 천하를 얻은 듯하고 볼을 스치는 미풍에도 흡족해 할 때, 엄마 등에 업힌 채 콧물 쭐쭐 흘리는 개구쟁이의 짖궂은 미소를 대할 때, 광활한 들판에서 우연히 마주친 무지개가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막힘없이 모습을 드러낼 때, 아쉬운 시절 부활절 시루떡봉지를 걸인에게 아낌없이 내미는 소년을 만날 때, 산사에서 어둠은 깊어가고 숲에는 적막과 눈만 쌓일 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주님이 말씀을 풀어주어 마음이 뜨거워질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한 때 하나님이셨던 이의 절규를 들을 때.

우리의 본향은 천국인것을…

그런 때, 마들렌 부스러기 담긴 홍차를 마시며 옛 향기를 어슴푸레 떠올리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됩니다. 우리의 본향은 천국인 것을, 이 땅에 영원히 머무르지 않음을 상기시켜주는, 세상에 심기워진 하늘나라의 흔적을 발견할 때 누구라도 아련한 데자부를 경험합니다.

로마서 1장의 말씀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대구 동아신경외과 원장·의학박사>